지자체들, 지역사업 띄우려 ‘국민청원 20만명 채우기’에 공무원들 동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0일 13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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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들들 볶으니까 주말도 반납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 받으러 돌아다녔습니다. 20만 명을 못 채우면 채울 때까지 해야 했으니 별 수 없었지요.”

경북 포항시청 공무원 A 씨는 “4월 한 달 동안 국민청원 홍보를 하느라 힘들었다”며 17일 본보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A 씨가 주민들을 만나며 동의해달라고 부탁했던 사안은 ‘포항지진 피해배상 특별법 촉구’ 청원이었다. 2017년 포항 지진은 정부 지원 사업인 지열 발전으로 인한 ‘인재’로 결론이 났고, 시민들이 여전히 사고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만큼 특별법을 만들어달라는 내용이다.

포항시는 3월 22일 올라온 이 청원에 대한 20만 명 동의를 얻기 위해 시청 공무원들을 동원해 한 달 간 홍보활동을 벌였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20만 명 이상이 동의를 하면 청와대가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이 청원은 결국 20만 명을 돌파해 21만2675명의 청원 동의를 받았다. 포항시는 17일 “(포항지진 피해배생 특별법 제정에 대해) 국회 차원에서 논의해 법 제정을 추진하면 정부도 적극 협력하겠다”는 청와대의 답변을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A 씨 등 공무원들은 주말 근무도 불사하고 홍보활동에 매달렸다. 일대 상가와 경로당을 돌아다니며 동의 인원을 늘려야 했다. 동의 인원이 20만 명을 돌파할 때까지 홍보활동에 적극 나서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사용이 서툰 시민에게는 청원 동의하는 법을 직접 알려주며 청원에 참여시켰다. 지인들이 참여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수십 군데에 해당 국민청원 링크를 뿌리기도 했다. A 씨는 “어디에 홍보를 했는지, 몇 명에게 홍보했는지 등 실적을 보고해야 해 다른 일들을 제쳐두고 홍보 활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 관련 사업을 추진하거나 지역에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청와대 국민청원을 활용하는 사례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와대 답변 기준인 20만 명을 채우기 위해 공무원을 동원해 ‘사람 채우기’에 나서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다.

경북 구미시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SK하이닉스 구미 유치’ 글을 올 1월부터 한 달 간 시청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띄우며 적극 홍보에 나섰다. 본보가 입수한 구미시의 ‘SK하이닉스 유치홍보계획’ 공문에 따르면 시는 ‘20만 명 이상의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구미시는 이 공문에서 유관 기관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고 홈페이지와 LED 전광판 홍보 문구를 송출해 유치 분위기를 조성하라고 명시했다. 전 직원이 SNS를 활용해 지인들에게 청원 링크와 동참 방법을 공유하라는 등의 방법도 상세히 제시했다. 구미시 공무원 B 씨는 “지자체가 중앙정부로부터 사업 예산을 따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국민청원에서 부각되면 전국적인 이슈가 되다 보니 지자체도 국민청원에 몰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종시도 이달 11일까지 한 달 동안 ‘청와대 세종집무실 설치’를 주장하는 국민청원에 시민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세종시는 지난해 ‘국회 세종의사당 설치’ 국민청원도 적극적으로 홍보한 적이 있다. 세종시 공무원 C 씨는 “주민자치위원과 통장들이 있는 온라인 단체 대화방에 참여 방법을 알려주면 이들이 주민들에게 알리는 식으로 홍보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김해시도 ‘김해신공항 반대 100만 국민 청원운동’에 시민들이 참여하도록 홍보 활동을 했다.

전문가들은 지자체가 지역 현안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국민청원 홍보에 공무원들까지 동원하는 등의 행태는 자칫 민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병대 한양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일부 지자체가 인기 영합주의적 정책을 위해 국민청원 제도를 이용할 소지가 있고, 지자체별 동원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국민청원 제도의 취지와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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