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제조업 생산 9년만에 감소… “공장 줄여야 이자라도 갚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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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중고기계 매물]
경기 악화에 인건비 상승 직격탄… 공장부지-기계 매각 ‘제살깎기’
중고기계 한달에 1대 나가면 다행… 그나마 해외 떠나는 기업이 사가
“공단 비는데 들어올 사람 없어 임차인 구해달라고 웃돈 주기도”

‘자식 같은 프레스 기계’ 매물로 넘기는 中企 22일 경기 안산시 반월국가산업단지 내 한 중소 
제조업체에서 15년 이상 쓴 프레스 기계를 중고 기계 매매 업체에 넘기고 있다. 이 회사는 이날 경영 악화로 기계 11대 중 
2대를 중고로 팔았다. 안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자식 같은 프레스 기계’ 매물로 넘기는 中企 22일 경기 안산시 반월국가산업단지 내 한 중소 제조업체에서 15년 이상 쓴 프레스 기계를 중고 기계 매매 업체에 넘기고 있다. 이 회사는 이날 경영 악화로 기계 11대 중 2대를 중고로 팔았다. 안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경기 군포시에서 전자부품 제조회사를 운영하던 A 씨는 지난달 초 프레스 기계 12대를 모두 팔았다. 일감이 없어 빚만 계속 늘어나자 사업을 접고 공장을 임대로 내놓기 위해서다. 계속 공장을 돌려봐야 대출이자조차 갚기 어려워 차라리 임대료를 받아 대출이자라도 갚으려는 생각이었다.

A 씨의 중고 기계를 사들인 중고 기계 유통업체 H프레스의 이모 대표(59)는 “자기 공장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며 “사업을 접고 싶어도 대출 청산이 어려운 영세한 사장들이 많다”고 했다. 중고 기계를 내놓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사겠다는 사람은 자취를 감췄다. 그는 “한 달에 기계 1대 팔기도 어렵다. 2월에 판 게 마지막 거래였다”고 했다.

○ 줄어드는 공장만큼 쌓여가는 중고 기계


16일 찾아간 경기 시흥시 한국기계유통단지는 평일 낮인데도 한산했다. 문이 열린 점포마다 기계들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유통되는 기계의 약 90%는 중고 기계다. 과거 거래가 활발하던 때는 지게차가 쉴 새 없이 기계를 날랐지만 이날은 조용했다. 단지 곳곳에 멈춰서 있는 지게차가 눈에 띄었다. 기계가 팔리면 배달을 하는 화물차 기사가 한 유통회사 직원에게 “(기계를) 빨리 좀 팔아요, 빨리”라고 농담을 건네자 직원이 “팔려야 팔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 직원은 “중고 기계를 팔겠다는 전화가 와도 요즘은 더 놓을 곳이 없어서 기다려 달라고만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만난 S종합기계의 장모 대표(51)는 기계 매입 관련 서류를 보여줬다. 5월 중순까지 보러 갈 중고 기계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시장에 나오는 중고 기계가 예년보다 2배로 늘었다”며 “대부분 힘들어서 공장을 줄이려는 사람들이 내놓는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기계로 매장을 꽉 채워두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장 대표는 “중고 프레스 시세도 계속 떨어지고 있어 1, 2년 사이에 20%나 하락했다. 유통을 하는 우리도 못 판 기계를 떠안고 있는 것 자체가 손해”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중고 기계가 시장에 나오기만 하고 매입을 하는 곳이 없어 남아도는 기계들의 해외 수출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기계산업진흥회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중고 기계 수출액은 매년 10% 안팎씩 늘고 있다.

24일 인도에 중고 프레스를 팔기로 한 D종합기계의 김모 대표는 “잘될 때는 국내에서도 한 달에 10∼20건씩 팔았지만 지금은 1, 2건 팔기도 어렵다. 그나마 해외 수요만 좀 있는 편”이라고 했다. 줄어든 국내 수요를 해외 공장들이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판 기계는 한국법인이 인도에 공장을 내면서 사들이는 것이라 수출로는 집계되지 않는다.

장 대표도 지난달 초 한 국내 회사의 필리핀 공장으로 중고 기계를 5대 팔았다. 장 대표는 “한국 기업들이 다 해외로 옮기고 있는지 요새 그나마 팔리는 게 다 그런 수요”라고 했다.

○ 제조업 침체에 밑바닥부터 타격

중소 제조업체들이 사업을 줄이면서 공장 매각이나 임대 매물도 늘어나는 추세다. 주로 공장의 일부를 부분 임대하거나 아예 공장을 매각하고 더 작은 규모의 공장을 임차하는 식이다. 시흥시 시화국가산업단지에서는 ‘현 위치 공장 임대, ○○평’ 등의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공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인근 중개업소들에 따르면 매물이 쌓이면서 3.3m²당 월 2만5000∼2만8000원 선이던 공장 임대료가 지난해 7월 이후에는 2만∼2만5000원 선으로 내렸다.

이곳에서 섬유제조업 공장을 운영하는 50대 후반 B 씨는 지난해 1만6528m²인 공장의 절반을 임대로 내놨다. 매출은 떨어지는데 인건비 부담이 늘어 궁여지책으로 공장을 쪼개 월세라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장 임차 수요가 없어 6개월이 넘도록 전체 임대 면적(8264m²) 중 약 1500m²만 임대할 수 있었다. 급한 마음에 최근 중개업소에 3.3m²당 1만5000원에라도 내놔 달라고 부탁했지만 여전히 임차인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B 씨 공장의 중개를 맡은 H공인중개사사무소의 김모 씨(61)는 “작년 여름 이후 공실이 늘면서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자 보통 0.3∼0.5%인 수수료를 1.5%까지 줄 테니 어떻게든 임차인을 먼저 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했다.

중소 제조업계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건 조선, 자동차 등 주요 산업 경기침체의 여파가 밑바닥부터 번지고 있어서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 제조업 생산지수는 지난해 103.5로 전년 대비 2.5%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2009년 5.2% 하락한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중소 제조업 생산량이 감소한 것이다.

홍순영 한성대 특임교수는 “최근 주 52시간 근로, 최저임금 상승 등으로 부담은 커진 반면 전체 경기가 살아나질 않아 중소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올해는 대외 여건도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돼 중소 제조업계가 받을 충격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시흥=주애진 기자 ja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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