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대법원·헌재 바꿔 대한민국 물갈이하려 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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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근간 바꾸는 막중한 자리인 대법관·헌재재판관 무더기 교체
이념편향 인사들로만 채운다면… 최고법원도, 대통령도 권위 잃을 것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2009년 5월 26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55세의 히스패닉계 여성 소니아 소토마요르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대동하고 백악관 회견장에 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토마요르를 차기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다며 이는 상원 법사위원 전원과 야당 지도자, 헌법학자들, 변호사단체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내린 결론이라고 밝혔다.

소토마요르는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초등학교 3년 중퇴 학력이 전부인 염색공 아버지를 9세에 여의고 마약과 갱 범죄가 득실대는 빈민가에서 소매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학해 프린스턴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공화당 대통령이 판사로 발탁하고 민주당 대통령이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할 만큼 신망 받는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오바마가 강조한 그녀의 장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소토마요르는 판사가 법을 해석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법권의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정치적 이념보다는 공정함을 추구하는 자질을 갖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고른 후보였지만 의회 청문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소토마요르가 상원 법사위에 제출한 서면답변서는 첨부자료를 빼고도 173쪽에 달했고, 89명의 상원의원을 직접 방문했다.

재산, 사생활, 과거 판결 등은 이미 지명전 FBI, 법무부 등이 검증하고 심층면접을 실시해 다 걸렀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과거 로스쿨 학생들에게 “항소법원은 정책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한 발언이 큰 걸림돌이 됐다. 사법적극주의 입장을 내비친 것 아니냐는 매서운 추궁이 이어졌다.

8월 6일 상원의원 100명 중 뇌종양 투병 중인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참여한 가운데 인준투표가 실시됐다. 의원 1명씩 일어나 “찬성” “반대”를 외치는 형식이었다. 결과는 찬성 68, 반대 31표. 미국 역사상 세 번째 여성 대법관, 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의 탄생은 이렇게 길고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지명에서 상원 투표가 이뤄진 근 두달 반동안 미 언론의 관심도 온통 소토마요르에 집중됐다. 미국 사회가 대법관이라는 자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준 과정이었다.

그렇다. 대법관은 한 명 한 명이 국가의 핵심 인스티튜션이며, 나라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막중한 자리다. 법적 다툼은 물론이고 인간 세상의 온갖 이견 갈등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려 강제하는 대법관은 최고의 경륜과 지혜, 균형감각을 지닌 법률가들이 맡아야하며, 그래서 더더욱 신중하게 인선하고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그 막중한 자리가 순식간에 무더기로 물갈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이미 대법관 14명 중 9명이 바뀌었고, 문 대통령 임기 내에 추가로 4명의 임기가 끝난다. 문 대통령이 무려 13명을 임명하는 것이다.

헌법재판관은 오늘 문형배 이미선 후보 임명이 강행되면 9명 중 8명이 바뀐다. 한 정권에서 최고법원 재판관이 이처럼 무더기로 바뀌는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원래는 전임 정권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새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정도 겹치며 엇갈리므로 5년 임기의 한 정권이 임기 6년인 대법관과 헌재재판관 다수를 교체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일찍 물러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지명하므로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대법원장의 뜻이 맞으면 사실상 모든 신규 임명을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다. 헌법재판관도 문, 이 후보가 임명되면 9명 중 6명이 진보 인사로 구성돼 위헌 결정 정족수를 채우게 된다.

미국의 경우 대법관이 종신직이어서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에 한 명 이상의 대법관을 임명하기도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민주 공화 양측이 지명한 대법관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게 된다.

사회의 구심점인 최고법원은 치우치지 않는 인사들로 구성돼야 한다. 사회의 이념적 분포를 극좌 1에서 극우 10으로 놓았을 때 4~6 사이에 분포하는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우리법, 국제인권법, 민변 등 출신을 대거 임명해왔다.

문 대통령이 이런 인선을 하는 것은 최고법원의 중요성을 간과해서일 수도 있고, 한국을 바꾸는데 대법관과 헌재재판관이 얼마나 막강한 동력이 될지 알기에 코드가 맞는 인물 위주로 고르는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 혁명을 했다고 착각하는 촛불시위 조직 세력들은 정치 경제 역사 등 모든 것을 물갈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물갈이는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호락호락 이뤄지지 않는다. 경제가 말을 듣지 않고 중산층은 등을 돌린다. 그래도 촛불주도세력들은 대법원과 헌재를 장악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미몽이 될 것이다. 헌재와 대법원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는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아무리 평소 이념적 지향성이 강했다 해도 최고법원 판사에까지 오른 법관들이 헌법과 법률보다 이념을 섣불리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정말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슈 앞에서 주관적 정의감과 이념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고,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들은 최고법원 판사를 특정 정권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법원 코드화를 밀어붙이면 당장은 유용한 사회변혁 지원군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이룬 변화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최고법원의 권위와 신뢰를 무너뜨린 대통령으로 오점만 남기게 될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대법원#헌법재판관#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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