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하준경]경력이냐 출산이냐, 한국여성의 괴로운 선택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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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출산하면 육아 내몰리는 韓여성
경력단절은 최고, 가사노동 부담은 최악
보상심리 때문에 자녀 사교육 경쟁 돌입
여성노동력 지킬 수 있어야 출산도 늘어
돌봄에 재정지출 늘리는 정부 결단 필요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요즘 대학의 경제학 강의실에 들어가 보면 여학생 비율이 절반이다. 전국 대학 신입생 중 여학생 비율은 몇 년 전부터 50%다. 학점이나 취업률 등 질적 측면에서도 여학생의 성취는 남학생과 동등하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생활을 10년 정도 하고 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20대 후반에 74.9%이던 여성 취업률은 30대 후반 59.7%로 떨어진다. 경력 단절 현상이다. 이 수치는 40대 후반에 71%로 반등한 후 다시 떨어지는데 일자리의 질은 예전만 못하다. 막대한 공적·사적 교육 투자로 형성된 여성 인적자본의 시장가치가 회복되기 힘든 수준으로 파괴된다.

경력 단절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이 가장 심각하다. 미국은 경력 단절이 미미해 30대 후반 여성의 취업률이 74.3%고, 일본도 73.4%다. 한국 젊은 여성의 인적자본 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그 가치가 파괴될 확률도 세계 최고다. 이는 돌봄노동 부담 때문이다. 우리나라 성인 여성의 평균적 가사노동(가정관리와 돌봄) 시간은 하루 4시간인데, 어린 자녀가 있으면 여기에 2시간 이상을 더해야 한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연령별로 보면, 20대 후반부터 점차 높아져 30대에 정점을 찍고 40대 초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데 이 연령대가 경력 단절 시기다.

헝가리 인구연구소가 추산한 유럽 주요국의 연령별 가사노동 시간 패턴을 보면 우리처럼 젊은 여성들이 가사노동, 특히 돌봄 부담을 많이 떠안는 나라가 없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가 한국에 근접한 모습인데, 이들 모두 출산율이 1.4명 미만으로 유럽 최저 수준이다. 젊은 여성들을 돌봄노동으로 내모는 사회에서 출산율은 왜 저조할까. 젊은 여성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일단 결혼하면 경력 단절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지금까지 쌓아온 인적자본의 가치를 지키려면 결혼을 늦춰야 한다. 결혼을 해도 노동시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아이를 적게 낳아야 한다. 불가피하게 ‘경력단절녀(경단녀)’가 될 확률을 생각하면 자신보다 인적자본을 많이 쌓았거나 소득 기반이 튼튼한 배우자를 만나는 게 좋겠지만, 이렇게까지 꼭 결혼을 해야 하나. 인적자본의 가치를 비교적 잘 지켜주는 공공부문의 종사자나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소득층이 아니라면 이런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누구든 일단 경력 단절이 되면, 자신의 파괴된 인적자본 가치를 자녀의 인적자본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자녀를 남들 못지않게 키우는 것을 새 목표로 삼고 나면 각종 사교육 정보에 귀 기울이게 되고, 군비(軍費)경쟁과도 같은 사교육비 경쟁을 피할 수가 없다. 한국의 소득 대비 사교육비 지출은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 수준이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여성의 고학력화와 노동시장 참여는 출산율을 낮춘다는 것이 과거 많은 연구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엔 적어도 고학력 선진국에서는 여성의 경력 단절을 줄이는 게 출산에도 좋다는 것이 정설이 됐다. 인적자본이 안전하게 지켜지면 자녀를 갖고 싶어 하는 인간 본능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여성의 과도한 돌봄 부담을 줄이려면 재정 지출도 늘려야 하지만, 관련 당국자들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인적자본을 존중하고 이들을 수혜자로 보기 전에 납세자와 고객으로 봐야 한다.

초등학교 학부모총회를 예로 들면, 미국에선 저녁에 모임을 갖고 또 총회 시간엔 아이와 아이 형제자매를 돌봐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학교가 일찍 끝나면 방과 후 돌봄을 그만큼 앞당겨 단 1시간도 공백이 없게 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작은 부분에서도 교육과 보육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다. 돈을 조금 쓰면 해결될 문제들도 공급자들의 의견이 대립하면 책임 소재를 따지다가 현상유지로 끝나거나 알맹이 없는 보여 주기 식 대책으로 귀결된다.

지금은 여성이 아이를 등에 업거나 데리고 다니며 일하기 어려운 시대다. 국가가 돌봄체계 수요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돌봄의 시장화, 돌봄비용 상승을 방치하게 된다. 결국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인적자본의 가치를 파괴하며 경단녀가 될지, 아니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지, 그 사이에서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육아#경력단절#가사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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