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재발표 6시간만에, 北 對南창구 폐쇄… 한반도 정세 격랑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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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연락사무소 북측 인력 철수]北, 南 때리기로 美에 경고장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하겠다고 전격 발표한 22일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청사 내 브리핑실을 떠나고 있다. 북한의 이번 결정으로 남북 화해 국면의 상징이던 연락사무소는 개소한 지 약
 반년 만에 운영 중단 위기에 놓이게 됐다. AP 뉴시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하겠다고 전격 발표한 22일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청사 내 브리핑실을 떠나고 있다. 북한의 이번 결정으로 남북 화해 국면의 상징이던 연락사무소는 개소한 지 약 반년 만에 운영 중단 위기에 놓이게 됐다. AP 뉴시스
북한이 22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돌연 철수를 통보하면서 하노이 결렬 이후 ‘새로운 길’을 위한 본격적인 첫 행동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하노이 결렬 이후 처음으로 독자 대북제재를 발표한 지 6시간여 만에 유일한 남북 소통창구를 폐쇄하는 초강수를 둔 것. 청와대가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일축하고 대남·대미 압박 강도를 끌어올리면서 ‘김정은 페이스’로 한반도 상황을 이끌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특히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기자회견 내용을 1주일 만에 공개하면서 ‘핵단추’를 거론해 한반도 정세가 지난해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 최대 격랑 속에 빠져들고 있다.

○ 미 대북제재 단행에 총공세 나선 北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수를 통보한 것은 이날 오전 9시 15분경. 북한은 남북 연락대표 접촉을 요청한 뒤 “북측 연락사무소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철수한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북한 측 인력 15명은 간단한 서류만 챙겨 사무소를 떠났다.

북한의 연락사무소 철수는 이날 새벽 미국 재무부가 불법 환적을 통해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도운 중국 해운회사 2곳에 대한 독자 제재를 단행하고 한국 선박 등 불법 환적 의심 선박에 무더기 ‘해상거래 주의보’를 발령한 데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날 연락사무소 철수뿐만 아니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15일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핵 단추나 로켓 발사 단추를 누르시겠는지 안 누르시겠는지에 대해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발언도 공개했다.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겨냥한 총공세에 나선 것이다.

하노이 결렬 이후 구두 경고만 날리던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첫 타깃으로 실질적인 조치에 들어간 것은 연락사무소가 갖는 상징성을 고려한 것이다. 남북연락사무소는 지난해 4월 27일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합의에 따라 지난해 9월 14일 개소된 시설. 남북 군사합의서와 함께 한반도 긴장 완화의 대표적인 성과였던 연락사무소를 189일 만에 전격 봉쇄하면서 남북미 3각 구도로 이어온 대화 국면을 다시 판문점회담 이전 대치 국면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얘기다.


특히 1,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중재자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가 강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한미 갈라치기에 나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하노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로 미국 제재 완화를 끌어내지 못한 데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진 데 대해 한국에 “중재자로서 한 일이 뭐냐”는 식으로 화살을 돌린 것.

실제로 북한 대외 선전매체 메아리는 “남조선 당국이 무슨 힘으로 중재자 역할,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며 “제정신을 가지고 동족과 함께 미국에 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할 말은 하는 당사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하노이 회담이 끝난 뒤 한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대남·대미 공세로 나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 ‘핵단추’ 언급한 北, 미사일 도발 재개하나

연락사무소 철수로 포문을 연 북한은 앞으로 강경대응 수위를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보인다. 다음 타깃은 미국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최선희가 예고한 김 위원장의 성명이 임박했다는 신호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 위원장이 다음 달 11일 제1차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를 소집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2기 체제’ 정비를 마친 김 위원장이 ‘새로운 길’을 담은 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을 향한 행동에 돌입할 수 있다는 것.

북한이 핵·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를 뒤집고 도발을 재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사일 중단을 치적으로 앞세운 상황에서 연락사무소 철수를 신호탄으로 모라토리엄을 끝낼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도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중단하고 도발 재개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미국이 처음으로 한국 선박을 대북제재 위반 의심 리스트에 올려놓은 데 이어 북한의 연락사무소 철수로 하루 사이 북-미 양쪽에서 타격을 받은 한국 정부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전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남북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이번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청와대는 이날 오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다시 한번 NSC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남북 정상회담을 공개적으로 제안한 지 닷새 만에 북한이 연락사무소 철수를 단행하면서 한국의 북-미 대화 중재·촉진 구상을 거부한 만큼 당분간 남북 관계도 냉각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문병기 weappon@donga.com·한기재·이지훈 기자
#미국 대북제재#북한#남북연락사무소 철수#문재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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