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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코리아 디스카운트’, 북한만 탓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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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코리아 디스카운트’, 북한만 탓할 수 없다

박용 뉴욕 특파원입력 2019-02-23 03:00수정 2019-02-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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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미국 뉴욕에서 일하는 금융인 A 씨는 2017년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던 때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의 고위 간부를 만났다. 그는 북한의 핵 개발과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해 금융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놨다고 한다. 알고 보니 싱가포르 국방부 고위 관료 출신으로 투자와 관련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석하는 ‘진짜 전문가’였다는 게 A 씨의 얘기다.

한국 연기금이나 국부펀드도 그런 전문 인력을 채용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A 씨는 “최고경영자(CEO)의 수명부터 보라”며 “임기를 다 마치기도 어려운데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오래 버틸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국 연기금의 덩치는 월가에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CEO 임기가 단명하는 문화는 여전하다.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중 임기를 다 채운 사장은 진영욱 전 사장이 유일하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3년 임기를 넘기면 장수 CEO로 대접을 받는다. 월가 사람들도 한국의 연기금이나 국부펀드 CEO는 정권이 바뀌면 으레 교체되는 자리라고 짐작하고 있다.

월가에는 “직업이 사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베테랑 CEO가 즐비하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14년째 CEO로 일하고 있다. 로이드 블랭크파인 골드만삭스 선임회장도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12년간 CEO로 일했다. 월가 바닥에서 누가 전문가이고 요즘 무엇에 투자하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꿰고 있는 이들이다. 인맥을 동원해 전화 한 통으로 실무자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뚝딱 처리하는 베테랑 전문가들이 파리 목숨처럼 단명하는 한국 금융권 CEO들의 이름이나 제대로 기억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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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진에 베테랑 전문가가 포진하고 있으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국내 연기금의 해외 사무소와 인력 규모는 외국 연기금은 물론이고 민간 금융회사에 비해 뒤처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책임자가 공석이거나 담당자가 하도 자주 바뀌니 미국 금융회사들이 다른 한국 금융사에 “그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긴 하는 거냐”고 묻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해외 투자액 194조 원 중 40%를 북미시장에 투자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뉴욕사무소장은 지난해 7월 이후 최근까지 공석이었다. 124조 원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우정사업본부의 뉴욕사무소는 연구 조사와 연락사무소 역할 정도만 하고 있다. 책임자도 거의 1년마다 바뀐다.

전문 지식과 풍부한 경험보다 직급과 직위 등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조직문화에서는 전문가들이 발붙이기 어렵다. CEO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람을 물갈이하는 ‘적폐(積弊) 청산’도 ‘베테랑 기근’의 원인이다. 적폐 청산이 고장 난 시스템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겨냥할 때 베테랑은 사라지고, 전문가는 숨어 버린다. 핵심 인력이 이탈하면서 ‘전문가 기근’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연기금은 국민의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수탁자의 책임’을 다하기도 벅차다.

한국 기업이나 금융회사가 세계 시장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북한 핵위협 등 지정학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들이 활약하는 월가에서 베테랑 전문가 없이 수익을 내라고 요구하는 건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풀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금융의 삼성전자가 왜 없느냐”고 한탄하기 전에 “금융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로이드 블랭크파인은 왜 나오지 않느냐”부터 따져 봐야 한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코리아 디스카운트#전문경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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