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장관석]2년 전 탄핵에 가려진 제1야당 정책 논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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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석 정치부 기자
장관석 정치부 기자
‘감마하이드록시뷰티레이트(GHB).’

서울 강남 유명 클럽 ‘버닝썬’에서 유통된 물뽕의 본명이다. 1998년 당시 3년 차 검사였던 김희준 변호사는 이 약물 이름을 사람들이 어려워하자 단 두 글자, 물뽕으로 압축했다. 20년이 지나도록 이 말이 통용되는 건 복잡한 건 확 덜어내 입에 달라붙게 만든 ‘표현의 선명성’ 덕분이다. 주가 조작, 기업 인수합병(M&A) 시장까지 확장한 폭력조직을 ‘3세대 조폭’이라 명명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 김 변호사는 “쉽고 선명한 메시지를 써야 사람들이 잘 기억한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전당대회 레이스에도 ‘보수 선명성 경쟁’이 한창이다. 한 표가 아쉬운 선거에서 보수 표심을 자극하려니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유독 최소한의 담론 경쟁이나 토론마저 도외시되고 오로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네가 한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탄핵을 둘러싼 선명성 논란만 양산되고 있다.

탄핵을 기준으로 한국당 전대를 보면 당 대표 후보 세 명 중 탄핵을 반대했던 김진태 후보가 가장 선명하다. 김 후보를 지지하는 태극기 부대는 합동연설회장 분위기를 연일 압도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을 향해 “빨갱이는 물러나라” “위장 우파 나가라”고 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안철수나 유승민을 지지한 표를 누가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묻자 이들은 “김진태”라고 답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 급기야 “박 전 대통령 탄핵이 타당했는지 동의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 보니 제1야당 대표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정책과 이념,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4차례 TV 토론회, 3차례 전국 합동연설회가 열렸지만 탄핵을 둘러싼 공방 외에는 별로 기억에 없다. 당원과 국민들은 제1야당 후보들이 생각하는 정책의 문제점과 대책은 무엇인지, 말만 번지르르한 건 아닌지 판단할 기회를 잃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무너진 당을 수습하고, 보수의 지향을 치열하게 논쟁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용광로 전대’로 만들자는 말은 꺼내기도 민망한 지경이다. 바른미래당의 한 의원은 한국당 전대에 대해 “이런 상황에서는 새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후폭풍이 클 것”이라고 했다.

새 대표가 선출되는 27일이면 지난해 7월 출범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막을 내린다. 그동안 김병준 비대위는 내내 존재감 논란에 시달렸다. 시선을 확 끌 만한 ‘정치적 물뽕’도 없었다. 그래도 문재인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을 ‘국가주의’ 담론으로 비판하며 국정의 어젠다를 만들려고는 했다. 지금 제1야당의 새 대표가 되겠다는 후보들은 어떤가. 2년 전 탄핵을 놓고 자극적인 말만 주고받은 것 외에 당원과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전대를 이렇게 치러 놓고 한국당이 과연 ‘태극기 부대’만 탓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장관석 정치부 기자 jks@donga.com
#탄핵#자유한국당#물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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