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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연욱]장남 직업란 ‘깡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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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연욱]장남 직업란 ‘깡패’

정연욱 논설위원 입력 2019-02-12 03:00수정 2019-02-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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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가 최근 판사들에게 보낸 재산신고 안내문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자녀 등이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경우 자녀의 재산 고지(告知)를 거부할 수 있는데, 안내문은 고지 거부 절차와 함께 모범 입력 사례를 소개했다. 모범 사례 중 장남 직업란에 ‘유아(幼兒) 깡패’라는 황당한 단어가 적혀 있다. 행정처는 “전산 실무자가 재미 삼아 쓴 것인데 그대로 발행됐다”며 단순 해프닝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어이없는 일이다.

▷문구나 토씨 하나도 꼼꼼하게 따지는 판사들이 실무자들의 작업 내용을 다시 점검하는 절차를 거치는 데 모두 손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법원 주변에선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가 들어선 뒤 행정처가 ‘적폐’로 몰려 근무 기강이 해이해진 상황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에서도 ‘에이스’ 판사들이 몰려 있다는 행정처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아무리 재산신고를 위한 절차지만 자녀들의 직업까지 써내야 한다니 씁쓸하다. 사실 과거에는 부모와 친인척들의 직업이나 인적사항을 묻는 경우가 허다했다. 입사나 부동산 등기를 할 때도 신원이 확실한 친인척들을 보증인으로 세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성인 2명이 법률적 행위에 대해 보증을 서야 하는 인우보증(隣友保證)제가 있어 가족 중에서 재산이 많거나 신원이 확실한 사람을 찾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인우보증제는 주변인들에게 책임을 물리는 구시대적 제도라는 비판을 받고 사라져 갔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부모의 직업이나 학력을 써내라고 요구하는 일은 없다. 담임교사가 개별적으로 기초 조사를 하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학생 부모의 직업 종교 등을 묻지 못하게 되어 있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에서는 ‘블라인드(blind) 채용’이 의무화되었고, 민간 기업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지원자의 가족관계 등을 보지 않고 개인의 직무능력과 역량만으로 채용하는 방식이다. 채용비리에 민감한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블라인드 채용 흐름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다. 재산고지 거부 항목의 자녀 직업란 논란을 계기로 법원도 보다 유연하게 변해가야 한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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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재산신고#인우보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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