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해리스의 콧수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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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외교관인지 군인인지 잘 모르겠다. 터프 가이인 건 분명하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10일 타결된 뒤 청와대와 외교부 주변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해리스 대사가 지난해 12월 28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제시한 총액 10억 달러(약 1조1300억 원) 이상, 협정기한 1년이란 마지노선과 크게 달라진 것 없이 협상이 최종 타결됐기 때문이다. 몇몇 청와대 관계자는 해리스 대사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였다며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그런데, 해리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북핵 외교에 다걸기(올인)하고 있는 동안 역대 최고위급 주한 미대사라는 해리스, 더 나아가 그를 선택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원래 모습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뿐이다.

취재차 수년간 해리스를 지켜본 기자는 그가 지난해 7월 콧수염을 기르고 서울에 나타났을 때 어색해 웃음이 나왔다. 현역 군인 시절 깔끔하다 못해 파르라니 면도한 얼굴에 해군 정복을 입고 미 워싱턴에 나타나 의원들에게 군사비 인상 필요성을 역설하던 해리스였다. 그는 부임 당시 콧수염을 기른 이유에 대해 “군인이 외교관이 됐다. 신선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40년 넘은 그의 강성 군 이미지를 가리려 했던 것 같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잘 알려진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유독 튀어나온 앞니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듯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한국 사람들은 해리스를 편안해 보이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다. 하긴 최근 주한 미대사들은 워낙 대중 친화적이었다. 칼로 얼굴에 테러를 당하고도 ‘같이 갑시다’를 외쳐 한미동맹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마크 리퍼트,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는 캐슬린 스티븐스 등이 그랬다.

하지만 콧수염을 기르기 전 해리스는 ‘군인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이미 전설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동양계 최초의 미 해군 4성 장군인 해리스는 대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하와이에 본부가 있는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이었다. 지금은 인도-태평양사령부로 이름이 바뀐 이곳의 전력은 웬만한 나라 몇 개의 군사력을 한데 모아놓은 수준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등 미 서부 해안부터 태평양을 거쳐 인도까지, 지구 면적의 52%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을 관할했다. 거느린 병력은 37만5000여 명이었고, 지휘하던 항공모함만 5척.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주한미군도 해리스의 명령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왜 취임 후 1년 반이나 주한 대사 자리를 비워놓다가 애초 호주 대사로 가려던 해리스를 서울로 보냈는지에 대해선 다양한 관측이 나왔다. 태평양사령관 시절부터 대북, 대중 강경파였던 그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면서 비핵화 협상에서 성과를 내려 한다는 게 다수설이었다. 주한미군 분담금을 더 얻어내려고 동북아 군사 전략에 능한 해리스를 낙점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소수설이었다. 분담금 협상 과정과 결과를 보니 이젠 소수설이라고 할 순 없을 듯하다.

분담금 협정 기한 1년 원칙에 따라 한미는 곧 내년도 협상에 들어간다. 미국 사회에서 다년 계약은 이례적이고 1년 계약이 보통이다. 연봉이나 집 계약도 그렇다. 협정 기한이 1년으로 바뀐 것은 이젠 본격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로 협상하겠다는 뜻이다. 이걸 아는 청와대도 1년은 끝까지 막아보려 했다. 지금이라도 콧수염에 가려진 해리스의 진면목을, 그를 보낸 트럼프의 뜻을 간파하고 제대로 협상 준비에 나서야 한다. 한미동맹을 해치지 않으면서 한국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묘안 내기가 앞으로 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해리 해리스#주한 미국대사#방위비 분담금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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