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온 ‘자본주의 청년’ 정시우 “주식회사 형태 ‘빵 공장’ 했습니다”

  • 신동아
  • 입력 2019년 1월 18일 1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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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이전과 이후 평양은 다른 세계
● 평양은 돈이 돈을 버는 곳
● 주체사상? 물 건너갔다
● 돈 넣고 돈 먹는 재개발 비즈니스
● 평양에서 본 ‘태양의 후예’ ‘해를 품은 달’
● 김태희 이민호 장나라 팬 많아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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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스물여덟이다. 평양시 대동강구역에서 태어났다. 2017년 탈북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 태어나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3월부터 연세대 경영학과에서 공부한다. 평양의학대학에 합격했으나 어머니가 탈북하는 바람에 입학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시작할 늦깎이 대학 생활에 기대가 크다. 경영학을 선택한 것은 평양에서의 사업 경험을 살리기 위해서다.

우리 집은 북한에서 ‘애국자 집안’이다. 앞길이 구만리 같았는데 어머니의 탈북으로 삶의 경로가 바뀌었다. 요즘엔 가족이 한국에 정착했다고 해서 연좌로 처벌받는 일은 없다. 특권인 평양 거주 자격이 박탈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발전할 길은 막힌다. 군대도 못 가고, 입당도 못 한다.

“보란 듯 잘살아보자”

한국이나 북한이나 대학 가는 이유는 같다. 발전하기 위해서다. 북한에서는 입당해 중앙당이나 중앙기관에서 일하는 게 엘리트 코스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입당할 길도 막혔다. 잘나가다 한순간 고꾸라진 것이다. 삶에 의욕을 잃고 의기소침했다. 미래 고민 탓에 술도 꽤 마셨다. 어느 날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각했다. “보란 듯 잘살아보자”고 다짐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평양에서 2년간 ‘알바’를 했다. 북한에서도 파트타임 잡을 알바라고 한다. 알바를 해 모은 돈으로 개인 사업을 막 시작할 즈음 서울에 정착한 어머니와 선이 닿았다. 어머니는 서울 강동구에서 냉면을 파는 음식점을 경영한다. 어머니가 송금 브로커를 통해 보내준 돈을 보태 사업을 키웠다. 2012년 3월부터 2017년 1월 탈북할 때까지 사업가로 살았다. 장사나 자영업을 북한에서는 ‘개인 사업’이라고 일컫는다.

평양에서 ‘탁구 열풍’이 불었다. 지금도 이어진다. 시설,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탁구장 이용료는 1시간당 북한 돈 5000원(1달러가 북한 돈 8000원) 정도다. 5000원은 쌀 1㎏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시설이 훌륭한 탁구장은 1시간당 4달러를 받기도 한다.

내가 시작한 탁구장 사업이 꽤 잘됐다. 맥주, 음료, 담배 판매 수입이 컸다. 상점에서 1000원에 파는 사이다를 탁구장에서는 3000원에 판다. ‘내기 탁구’를 한 뒤 진 사람이 맥주 값을 내는 식으로 유흥이 이뤄진다.

평양에서 개인 사업하는 이들의 업장은 기관으로부터 임차한 것이다. 북한 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허울만 사회주의일 뿐 계획경제로 인민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끝난 지 오래다. 자본만 확보하면 누구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사업 환경이 매우 좋아졌다.

자본 외에 필요한 것은 인맥이다. 북한은 검열의 나라다. 중앙당이나 군부, 보위성, 보안성에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사업이 날개를 단다. 기관의 명의를 빌려 사업을 하고 그 기관에 이익금의 일부를 바치는 형태다. 힘을 쓸 수 있는 사람들과의 안면(顔面)이 중요하다. 뇌물이 윤활유 역할을 한다.

빵 공장에 투자해 배당 받아

탁구장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3500달러(한국 돈 390만 원)를 투자했다. 월 매출이 많을 때는 800달러에 달했다. 대신 나가는 돈이 많다. 달마다 400~500달러의 비용이 소요된다. 종업원 1인 월급은 30달러 수준이다. ‘기관’에 바치는 돈이 매달 300달러쯤 된다.

종업원 월급은 달러로 준다. 2009년 화폐개혁은 완전히 실패했다. 북한 돈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외화로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다. 시장마다 암달러상이 진을 친다. 국가에서 달러를 원화로 교환해주는 환율은 엉터리다. 공식 환전소 환율이 1달러=100원인데 암시장 환율은 1달러=8000원. 공식 환전소에서 돈을 바꾸는 평양시민은 없다. 멋모르는 외국인이나 공식 환전소를 이용한다.

북한에서 사장은 ‘책임자 동지’라고 한다. 내가 젊은 나이에 ‘책임자 동지’가 된 것처럼 평양은 사업적으로 기회의 땅이며 자본주의화돼 있다. ‘책임자 동지’가 종업원을 직접 고용하고, 해고한다. 탁구장과 빵 생산, 휴대전화 판매 등 개인사업을 통해 수입이 많을 때는 월 1500달러(한국 돈 170만 원)를 벌었다.

나는 빵 생산 기업에 투자해 매달 배당을 받았다. 한국의 주식회사를 떠올리면 된다. 지분에 따라 수익을 나눠 갖는 방식이다. 빵 공장에는 나를 포함해 3명이 투자했다. 쉽게 말해 3인 ‘책임자 동지’를 둔 것이다. 나는 3000달러를 투자했는데 많을 때는 월 이익금 450달러를 받았다. 투자액에 비교해 수익이 높아 놀란 분도 있을 것이다. 통상의 경우 매달 투자액의 10%, 좀 센 데는 20%까지 이익금이 배분된다. 이렇듯 평양은 돈이 돈을 버는 곳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의 재벌 같은 사업가가 북한에도 등장할 수 있다.

“국가가 어떻든 내 입만 굶지 말자”

평양의 한 마트에서 시민들이 쇼핑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평양의 한 마트에서 시민들이 쇼핑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북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북한 돈 4000원(0.5달러) 수준이다. 공식 월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계는 시장을 통해 유지된다. 빵을 만드는 국가기업소가 있으나 인민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김정은은 깨인 지도자다. 개인에게 맡기면 생산이 는다는 것을 아는 거다. 식당이니 이발소 같은 곳도 다 개인이 운영한다. 국가에서도 경제가 자본주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다 안다. 다만 막지 않는 것이다.

평양의 20대는 자본주의적 삶이 체화돼 있다. 한국에서는 우리를 두고 ‘장마당 세대’라고 칭하던데 그것은 평양의 현재 상황을 협소하게 본 것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됐으며 돈을 따라 사람이 움직인다. 장마당은 구전되는 말일 뿐 공식 명칭은 ‘시장’이다.

주체사상? 물 건너갔다. 누가 사상에 신경 쓰나. 김일성주의, 김정일주의를 애국주의라고 한다. ‘김일성주의 정수분자’ ‘김정일주의 정수분자’는 20대에는 없다. ‘국가가 어떻든 내 입만 굶지 말자, 내가 잘 먹고 잘살자’는 인식이 삶을 지배한다. 어른들은 다를 수 있으나 우리 세대는 그렇다. 학교 다닐 적 ‘김일성 동지 혁명역사’를 열심히 공부했으나 다 헛소리다. 지금 10대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하다. 김정은 때 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면 나중에 먹힌다는 인식도 강하다. 역사를 보면 3대 이후 세습이 계속되기는 어렵지 않나.

평양의 백화점(평양1백화점, 평양2백화점이 있다)이 예전에는 상품을 진열만 해놓고 팔지는 않았다. 지금은 한국 백화점과 똑같다. 평범한 사람들도 백화점에서 물건을 산다. 마트에서도 서울과 똑같이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쇼핑한다. 김정은 집권 이전의 평양과 이후의 평양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한국, 미국 드라마도 엄청나게 들어와 있다. 평양 시민들이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평양 시민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북한이 발전하려면 개혁·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식 경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50, 60대 어른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 평양 시민들이 김정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서다. 평양의 경제 사정이 괜찮다. 쌀값, 기름값이 안정돼 있다. 쌀은 다 해결됐고, 과일 등 먹을 것도 해결됐다. 중국에서 곡물로 만든 오일(바이오에탄올)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개인택시도 등장

미용실, 이발소 등의 자영업이 등장했다. (왼쪽) 평양 택시. [AP=뉴시스]
미용실, 이발소 등의 자영업이 등장했다. (왼쪽) 평양 택시. [AP=뉴시스]
옥류관, 청류관 등 국영을 제외하면 평양의 거의 모든 식당을 개인이 운영한다. 명목상 각급 기관 산하에 속해 있으나 자본을 댄 개인이 영위한다. 식당을 사고팔기도 한다.

국영 이발소에 가서 머리칼을 깎으면 요금이 북한 돈 2000원인 반면 개인 사업장은 1만5000원을 받는다. 가격이 비싼데도 개인 이발소가 잘된다. 국가 이발소는 정형화된 스타일로 깎아주는 반면 개인 사업소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잘라준다. 따듯한 물로 머리도 감겨주고 엄청 세심하게 관리한다. 돈 좀 버는 사람들은 국가 이발소에 가지 않는다.

북한에도 노래방이 있다. 식당에서 노래방을 함께 운영한다. 한국처럼 방값을 내는 방식이다. 이용료는 1시간에 5달러 수준이다. 식당 단골이면 할인도 해준다. 5시간 놀았는데 3시간 돈만 받는 것이다.

‘자본주의 날라리’라고 비판받던 행동이 널리 퍼진다. 평양 살 때 진짜로 못해본 게 없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잘 놀았다. 호텔이니 모텔이니 하는 숙박업은 없다. 평양 호텔은 일반 시민이 이용하지 못한다. 이성 친구를 집에 데리고 가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분위기인 터라 집을 통째로 빌려주는 비즈니스가 생겼다. 1시간에 북한 돈 1만 원이면 빌릴 수 있다. ‘3시간 쉬고 갈게요’라고 말한 후 3만 원을 내고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다.

운수업도 활황이다. 개인택시도 있다. 개인이 승용차를 직접 구입해 회사에 적을 두고 운영하는 방식이다. 매달 수익 일부를 바치는 방식이 있고, 매달 내는 돈 없이 기간을 특정해 택시 영업을 한 후 승용차를 기업소에 바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지입차’라고 일컬어지는 시스템과 유사하다.

평양의 ‘접대원 동무’

이렇듯 지금 평양엔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고하게 서 있다. 통일이 이뤄지면 평양에 돌아가 사업을 키워볼 작정이다. 그래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어떤 사업을 할 거냐고? 우선 ‘땅’을 해야 한다. 아파트와 달리 땅은 아직까지 거래가 안 된다. 개혁·개방하면 땅이 거래될 수밖에 없다. 땅장사를 하면 노다지 같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나는 평양에서 ‘손전화’ 사업도 했다. 스마트폰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손전화 혹은 핸드폰이라고 칭한다. 한국은 010으로 시작하는데 북한은 191, 195다. 191은 평양 전용, 195는 지방 전용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1인이 191, 195 휴대전화를 각각 한 대씩 2대 등록할 수 있다. 개인사업을 하려면 손전화가 필수다. 실시간으로 물품 시세와 수급 현황을 파악해야 사업을 잘할 수 있다.

한국은 휴대전화를 신청하면 그날로 나오는데 북한은 두세 달 걸린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비슷한 것 같은데 돈을 많이 벌려면 법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불법은 하지 말되 비법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탁구장 사업을 번창시키려면 마약 장사꾼도 알고, 룸살롱 마담과도 친분이 있어야 한다. 평양에서 한국의 룸살롱 비슷한 업태는 식당에서 이뤄진다. 남자끼리 노래 부르며 노는 게 어색할 때 ‘접대원 동무’를 부르는 방식이다.

평양 시민들은 불법 혹은 비법적인 사업도 많이 한다. 자신 명의로 등록된 휴대전화를 사용하면 단속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대포폰’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게 평양에도 있다. 30달러를 주면 명의를 살 수 있다. 돈을 주고 이름을 빌리는 것이다. 돈을 받은 사람은 자기 이름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기관에 잘 아는 형이 있다. 나보다 세 살 위인데 “1대 뽑아줘” 하면 휴대전화가 곧바로 나온다. 그것을 파는 것이다. 기기는 중국산이다. 인터넷은 물론 안 된다. 게임은 된다. USB로 게임이 유통된다.

평양의 젊은 세대는 한국 드라마를 즐긴다. 나도 엄청나게 많이 봤다. ‘태양의 후예’ ‘해를 품은 달’ ‘도망자’ ‘아이리스’ ‘장난스런 키스’ ‘시티헌터’ 같은 드라마를 평양에서 봤다. 아주 옛날 것부터 거의 다 봤다. 김태희 이민호 장나라 팬이 평양에 특히 많다.

국정원과 경찰이 ‘삥’ 뜯는 격

처음에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려고 했다. 수능반에 들어가 8개월간 공부했다. 탈북민은 특혜가 있어 2등급 2개에 나머지 4등급이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다. 등록금도 면제다. 그런데 계산해보니 대학은 그럭저럭 다녀도 인턴·레지던트 마치면 나이가 마흔 살이 되겠더라. 북한에서 사업 경험이 있으니 ‘진짜 자본주의’를 공부해 사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현재의 평양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뒤섞인 과도기다. 그래서 사업하는 게 힘들다. 눈치 볼 데가 많다. 잊을 만하면 들이닥쳐 검열을 한다. 돈을 찔러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돈만 많으면 평양처럼 살기 좋은 곳도 없다. 돈을 무한대로 찔러줄 수만 있다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봐야 한다. 평양에서는 ‘뇌물을 준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인사한다’거나 ‘고이다’라고 표현한다.

북한 관료는 인민의 피, 땀을 뽑아 먹고 산다. 정복쟁이(관료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다. 정복쟁이가 ‘이거 불법이야’ 하면 합법도 불법이 된다. 보안원이 매일 들러 담배 한 값 상납받고, 술 한잔 얻어먹는다. 한국으로 치면 국정원과 경찰이 ‘삥’을 뜯는 것이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때도 담배 한 값은 예의다. 관공서에서 증명서를 받을 때도 담배를 줘야 한다.

보안원이 잡아먹겠다고 마음먹으면 사업이고 뭐고 박살이 난다. 찍히면 안 되기에 설설 길 수밖에 없다. 최고 부자는 중앙당 간부다. 군과 보위성, 보안성도 힘이 세다. 뇌물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곳이 북한이다. 힘 있는 기관에서 일하는 것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 단속 권한을 가진 곳이 특히 노른자위다. 북한에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있다.

“100원 떼먹으면 자기비판을 하고 1000원 떼먹으면 호상비판을 하며 1만 원 떼먹으면 주석단에 앉는다.”

녹화물 시청은 반국가범죄

‘빙두’ 장사도 평양에서 큰돈이 된다. 북한에서 히로뽕을 칭하는 말이다. ‘아이스’라고 칭하기도 한다. 함흥에서 주로 만든다. 한국에서는 히로뽕을 하면 감옥에 가는 것으로 안다. 북한은 한국보다 마약에 관대하다. 마약을 하다 걸리면 ‘위반범죄’인데 녹화물을 보다 걸리면 중범죄, 반국가범죄다.

녹화물 중 중국 영화는 괜찮다. 유럽 영화는 재미가 없어서 안 본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적발되면 노동교화형 3년부터 최고 사형까지 받는다. 젊은 세대라면 누구나 한국 드라마를 보는데 걸리면 중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걸리는 놈이 머저리”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내가 한국에 온 이유는 녹화물을 갖고 있다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고발했다. 투자 차원에서 평양 대동강구역에 주택을 샀는데, 그 집과 사업장도 정리하지 못했고 번 돈도 챙기지 못한 채 도주했다. 녹화물 소지죄로 감옥에 가면 인생이 끝장난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을 포함해 수천 개의 녹화물을 갖고 있었다. 곧바로 튈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실내수영장이 딸린 노래방을 경영하겠다는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수영장 사업을 시작하려면 3만 달러 정도가 든다. 괜찮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액수다. 평양에 수십만 달러에 거래되는 아파트가 등장한 것은 한국에도 알려져 있다.

재개발이 예상되는 지역의 주택을 두고 투자 바람이 분다. 주택을 사두면 재개발 시 아파트를 받을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고층보다 저층이 선호된다. 승강기가 없는 경우도 있으며 전기 사정 탓에 자주 멎어 고층에 살면 힘들다. 재개발이 유력시되는 곳에 집을 사둔 평양 사람들은 당국이 다음 개발 지역을 선정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재개발은 돈 넣고 돈 먹는 일종의 비즈니스가 됐다.

10년 후 평양

2018년 7월 4일 고려호텔에서 내려다본 평양시내. [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7월 4일 고려호텔에서 내려다본 평양시내. [사진공동취재단]
돈을 주고 차를 빌려 청진으로 갔다. 지방 사람들은 평양에 들어오지 못하나 평양시민증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다. 당일치기로 청진에 도착했다. 청진에서 국경도시 혜산으로 이동해 2017년 1월 5일 오후 4시 압록강을 건넜다. 보위성 놈들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렇게 탈북하는 통에 내 명의로 된 집, 사업하던 것을 다 날려야 했다.

나중에 들으니 보위성은 내가 평양 안에서 잠수를 탄 줄 알았다고 한다.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평양을 떠났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중국에 친척이 산다. 한 달 동안 톈안먼, 만리장성 등 관광을 했다. 가짜 중국 여권을 돈을 주고 구해 육로로 라오스로 이동했다. 라오스 주재 한국영사관을 통해 망명했다. 영사관 직원 분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줬다.

나는 외아들이다. 냉면 음식점을 하는 어머니가 한국에 잘 정착한 터라 서울 생활에 비교적 수월하게 적응했다. 평양이 언젠가는 서울처럼 바뀌리라고 본다. 북한은 더 이상 사상의 강국이 아니다. 주체사상은 옛날얘기다. 김정은이 사람들의 이 같은 심리를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가장 근래에 한국에 망명한 평양시민이면서 북한에서 ‘자본주의 청년 사업가’였다. 평양 출신 탈북민은 극소수다. 시장화한 평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돈 벌고 살아가는지 생생하게 전한 것은 이 글이 처음인 것 같다. 변화한 평양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10년 전 평양과 현재의 평양은 완전히 다르다. 10년 후는 또 다를 것이다.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내가 정치는 전혀 모르지만 나진·선봉과 비슷한 형태로 신의주 원산 청진 함흥부터 개방해 단계적으로 확대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월부터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걱정도 있으나 기대가 크다.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아 잘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잘해보겠다. 통일이 되면 평양으로 되돌아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기업을 경영하고 싶다. 평양은 언젠가 창업의 블루 오션이 될 것이다.


정시우

●1991년생
●출생지 : 평양시 대동강구역
●최종 거주지 : 평양시 보통강구역
●최종 학력 : 고등중학교 졸업
●2009.4~2011.10 평양기관차대 근무
●2011.11~2013.6 제2경제위원회 3총국 근무
●2012.3~2016.12 개인사업
●2017.1 탈북

글·정시우 북한이탈주민
정리·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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