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웃고 울며 견뎌낸 삶, 한 컷 사진에 다 있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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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사진/이규상 엮음/304쪽·4만 원·눈빛

사진가 김기찬이 1982년 6월 서울 중림동에서 카메라에 담은 천진난만한 아이들 모습(왼쪽 사진). 그는 골목에서 자신의 고향을 보았고,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느꼈다고 했다. 가운데 사진은 권태균의 1982년 사진 ‘소 주인’, 오른쪽은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82)가 1965년 찍은 청계천 판잣집 모습이다. 눈빛출판사 제공
사진가 김기찬이 1982년 6월 서울 중림동에서 카메라에 담은 천진난만한 아이들 모습(왼쪽 사진). 그는 골목에서 자신의 고향을 보았고,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느꼈다고 했다. 가운데 사진은 권태균의 1982년 사진 ‘소 주인’, 오른쪽은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82)가 1965년 찍은 청계천 판잣집 모습이다. 눈빛출판사 제공
소가 나무 아래서 풀을 뜯는다. 안개가 자욱하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진이지만 앞에 선 주름 가득한 남자의 눈빛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밀짚모자를 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초로의 이 남자는 피로함과 짜증스러움, 권태로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권태균(1955∼2015)의 사진 ‘소 주인’(1982년 경북 안동 촬영)이다. 남자는 무얼 잃어버린 것일까?

권태균은 사진전 ‘노마드’를 2010∼2013년 열었다. 엮은이는 “‘노마드’ 시리즈는 1980년대 산업화의 격랑에 휩싸여 전통과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이 땅의 사람들을 담고 있다”고 했다.

1988년 출범한 이래 사진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눈빛출판사가 한국 현대 사진 역사 70여 년의 궤적을 정리한 책이다. 다양한 세대와 장르의 사진가 80여 명의 작품이 담겼다.

부제 ‘한국 사진의 작은 역사 1945∼2018’에 걸맞게 책을 펴면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15일 당일 오후 전남 광양경찰서 무덕전(武德殿)에서 열린 시국수습군민회의 사진이 먼저 독자를 맞는다. 눈빛출판사가 1989년 낸 이경모(1926∼2001)의 사진집에 실렸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노산 이은상(1903∼1982)을 비롯한 남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건물 안에 둘러앉았고, 밖의 아낙네도 창틀 안으로 상체를 들이민 채 귀를 기울이고 있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광복의 풍경이다.

첫 장인 ‘역사를 말하는 사진’은 이처럼 사진이 격랑의 현대사를 얼마나 함축할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전화(戰禍)에 휩싸인 서울, 4·19혁명 당시 발포하는 경찰, 5·18민주화운동 시민과 계엄군의 모습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역사를 웅변한다.

여러 사진 속 얼굴은 한국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엮은이는 1956년 리얼리즘을 표방한 사진 그룹 ‘신선회’의 결성을 “사진사(史)적 대사건”으로 평가했다. 신선회의 좌장 격인 이형록(1917∼2011)의 사진 ‘거리의 구두상’(1956년 서울 남대문시장) 속 남자는 광이 나는 신사화를 늘어놓고 팔면서 정작 자신은 낡은 신발을 양말도 없이 신은 채 바지 밑단을 걷어붙였다. ‘자매들’(1958년 서울 면목동) 속 여자아이들은 지프차가 먼지를 내며 달리는 신작로에서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동생을 포대기로 업어 돌보고 있다.

거장 최민식(1928∼2015)이 찍은 가난한 이들의 얼굴과 김기찬(1938∼2005)이 포착한 1970, 80년대 서울 골목의 정겨운 풍경을 거쳐 사할린 한인의 눈물을 담은 새고려신문(사할린 한인신문) 이예식 기자(69)의 사진까지, 어느 한 장 뺄 것 없이 참으로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만든다. 심규동(30)의 2016년 사진 ‘고시텔’ 속 다리를 쭉 뻗지 못하는 청년의 모습은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사진이 여기 다 담겨 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제목 값을 한다. 눈빛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엮은이는 “사진은 다른 예술 장르 못지않게 부단히 한국인의 삶의 흔적을 기록해 온 주요 매체이며, 광복 이후 면면한 전통의 계보 속에서 앞선 세대의 사진을 극복하며 발전해 왔다”고 말했다. 눈빛출판사는 20일까지 ‘스페이스 22’(서울 강남구 강남대로)에서 창립 30주년 기념전을 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금까지의 사진#이규상#한국 사진의 작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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