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동정민]트럼프에 끌려가는 세계… 국제기구 수장들의 한숨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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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12일 오후 프랑스 파리 19구에 있는 빌레트 대박람회장의 아고라방.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주도로 올해 창설된 ‘파리평화포럼’의 국제기구 세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 유네스코, 국제노동기구(ILO) 등 주요 국제기구의 수장 6명이 원형 모양의 무대에 둘러앉았다. 이들의 목소리도, 표정도 어두웠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기념해 모인 많은 정상은 포럼에서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우려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한 비판이기도 했지만, 달리 보면 이를 해결해야 할 국제기구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강한 질타가 담겨 있었다.

포럼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흔들리는 국제기구의 소중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그는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 당시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국제연맹’ 창설을 주창했지만 2차 대전의 재앙을 겪고 나서야 유엔이라는 제대로 된 국제 커뮤니티가 생긴 것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유엔의 매일 매일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엔이 하는 일이 뭐냐’는 지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렇다고 그것이 이 조직을 파괴하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한번 파괴되면 다시 세우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제기구의 가장 큰 적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취임 후 국제기구를 향해 불만과 냉소를 쏟아냈다. 유엔을 향해 “친목 도모 클럽”이라고 하더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향해서는 “한물간 조직”이라고 비꼬았다. 유네스코와 유엔인권이사회는 아예 탈퇴해버렸다. 회원국들로부터 분담금을 받아 허구한 날 모여서 토론은 하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불만을 결별 이유로 내세웠다.

회원국들의 합의로 의사를 결정하는 태생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유엔은 북한 시리아 예멘 등 세계의 위험 또는 분쟁 지역에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IMF, OECD는 오래전부터 ‘포용 성장’을 외쳐왔지만, 국가 간 계층 간 경제 문화 정보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날 국제기구 수장들의 토론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트럼프류의 비난과 비판이 허튼소리만은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진단은 화려했으나 해법은 식상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세계화에 따른 낙오자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는 진단의 해법으로 휴먼 캐피털(인적자원) 투자를 제시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극단주의가 자유, 민주, 법치의 근간을 침식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다양성과 성 평등, 휴머니티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옳지만 공허한 이야기들이었다.

협력과 포용, 자유를 강조하는 국제기구들과 ‘초강대국(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 간 대결에서 전 세계는 트럼프 쪽으로 무섭게 끌려가는 현실이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프랑스 독일 캐나다 스웨덴 등의 정상들은 국제기구 편에 섰지만 정작 그들 각자의 나라에서도 트럼프식 국가주의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100년의 평화를 모색하는 포럼에 이른바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의 정상은 없었다. 국제기구들은 그동안 평화를 지탱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 평화포럼에선 국가주의 민족주의 포퓰리즘과 미중 패권 다툼 등으로 상처 나고 추락하는 국제기구들의 엄혹한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거대한 새 국제 질서가 밀려오고 있다는 느낌은 ‘이 격변의 시대에 대한민국은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느냐’라는 걱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트럼프#유엔#초강대국 우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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