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 없으면 공기업 취업도 못하고…” 박탈감 느끼는 취준생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1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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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가족공사’ 면접 팁은….”

19일 서울교통공사와 같은 철도 관련 기관 취업준비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서울교통공사 면접 팁’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면접 볼 때 ‘서울에서 지하철을 운전하시는 저희 친척을 보며 (입사를) 꿈꿔왔다’고 말하면 서울가족친지공사 문 부수고 합격”이라는 글에 ‘속 시원하다’ ‘너무 비꼬았다’ 등 댓글이 달렸다. 2018년 하반기 공개채용을 진행 중인 서울교통공사의 고용세습 의혹에 취업준비생들이 불안과 분노를 호소하고 있다.

● 면접 전형 중인 서울교통공사 수험생들 불안호소

서울교통공사는 26일까지 면접 전형을 진행 중이다. 면접 전형이 시작된 17일 한 지원자는 “다음날 면접인데 안 그래도 불안한데 자꾸 나오는 고용비리 뉴스를 보고 더욱 심란하다”며 “(비리 여부가) 사실이든 아니든 의혹이 제기된다는 것 자체가 ‘빽’ 없는 사람에겐 불안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공기업은 다른 곳보다 과정이 투명하다고 생각해 준비했는데 이 곳마저 이런다면 돈 없고 빽 없으면 취업도 못하고 가난도 대물림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고용세습 의혹이 제기된 직후부터 철도 관련 기관 취준생들의 커뮤니티에는 불안뿐 아니라 분노가 담긴 글이 올라왔다. “면접이 가장 친인척을 봐주기 좋은 전형 아니냐. 면접을 가지 말자”거나 “면접 일정이 (다른 곳과) 겹치는데 교통공사를 안 갈 것”이라는 등 면접을 보이콧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얼마나 좋은 직장이면 그렇게 정규직으로 전환하려고 기를 쓰겠냐”며 서울교통공사의 처우를 가늠하는 한편 “친인척 숫자 자체보다 정당한 절차 없는 정규직 전환이 문제 같다”는 등 게시물 50여 개가 쏟아졌다.

지난해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한 직원 A 씨는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찬성이지만 현대판 음서제로 정규직이 된다면 별개의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A 씨는 “이는 2년 가까이 공부한 끝에 입사한 나를 포함해 취준생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그 시간에 차라리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공공기관 계약직 자리를 소개해달라고 하는 게 더 현명했을 것 같다는 자조까지 든다”고 말했다.

● “구의역 사고도 한몫 챙길 기회였네요”

한국수출입은행 공개채용 필기시험이 열린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B 중학교 교문 앞에는 5대의 오토바이가 줄 지어 서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수험생을 다른 시험장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기다리는 행렬이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이 학교에서 약 12㎞ 떨어진 중구의 C 고등학교였다. 시험을 마치자마자 뛰어 나온 한 20대 여성이 “아저씨 늦지 않게 가주세요”라고 말하며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자 오토바이가 곧바로 출발했다. 제대로 인사조차 못한 채 딸을 보낸 아버지 신모 씨(56)는 “딸이 대학 입시 때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서울교통공사의 고용세습 소식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난다”고 말했다.

20일 한국은행, KDB산업은행, 예금보험공사 등 주요 금융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하반기 공개채용 필기시험이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정부 방침에 따라 학력, 출신지 등을 기재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으로 전형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 임직원의 친인척 108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고용세습’ 논란이 일면서 취업준비생과 가족들의 심정은 어수선해보였다.

예보 시험이 치러진 서울 마포구 D 중학교 교문 앞에서는 부모 10여 명이 시험을 마치고 나올 자녀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교통공사 고용비리 논란이 대화의 주제였다. 경기 화성시에서 수험생 아들과 함께 온 나모 씨(56·여)는 “있어선 안 될 일이 일어났는데 또 일어나진 않을까 부모로서 불안하다. 그들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문이 더 좁아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오가 지나면서 시험장 밖으로 나온 수험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성남시에서 온 최모 씨(25·여)는 “논란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냐. 계속 공부하고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정적이고 질 좋은 일자리로 선망 받는 공기업 정규직 채용이 ‘인맥’에 따라 이뤄졌다는 데에 수험생의 박탈감은 더 컸다. 한국예탁결제원 시험을 본 김모 씨(26)는 “인맥 통해 입사를 시킬 것이라면 왜 국가직무능력평가(NCS)를 보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 무기계약직 시험을 본 이모 씨(26·여)도 “정부가 공정한 채용을 위해 NCS, 블라인드 채용 등을 도입했는데 그 틈을 타고 인맥채용이 기어이 이뤄지는 것 보면 그 노력도 가상하다”며 혀를 찼다.

공사의 정규직 전환의 계기가 된 2016년 ‘구의역 사고’도 다시 회자됐다. 고려대 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고파스’에서는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승강장안전문(PSD)을 보수하다 숨진 하청업체 직원 김모 씨 사고 이후 서울시가 서울교통공사(당시 서울메트로) 정규직 전환을 결정한 것을 두고 “아깝게 청년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이 분들에게는 한몫 챙길 기회였네요”라고 쓴 글이 올라왔다. 다른 회원들도 “아주 그냥 제대로 해 먹네” 등 서울시와 공사를 비판하는 댓글로 호응했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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