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동맹의 자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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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무역전쟁, 중국 때리기로… 미국식 동아시아 질서 유지 방편
트럼프, 70년 血盟 연대감 허물고 문재인 정부도 동맹 이탈 의심 사
트럼프 아니꼬워도 中은 대안 못돼… 그것이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미국이 2003년 일으킨 이라크전(戰)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이라크 내에 숨겨진 대량살상무기(WMD)의 위협 제거가 개전(開戰) 이유였으나 WMD 같은 건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내에서도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하는 회의론이 일었다. 그러자 2006년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의 반론. “미국이 이라크를 향해 진군하자 리비아가 WMD 관련 대화에 나섰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생포 직후 리비아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라크전 무용론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국의 생리는 비슷하다. A를 때려 B를 굴복시키는 것은 제국의 오래된 방책이다. 제국적 특성에서 오늘날의 미국과 가장 비슷한 고대 로마도 그랬다. 로마는 자신의 우산 아래 있던 오리엔트 국가들이 파르티아 같은 강국의 세력권에 편입되려 하면 어김없이 출병했다. 강국을 때려 주변의 질서를 정리해 ‘팍스 로마나’를 유지했다.

작금의 미중(美中) 무역전쟁도 비슷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 양상으로 굳어지는 무역전쟁은 미국 산업 보호라는 목적 달성 외에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구심력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효과도 얻고 있다. 당장 한국부터 중국에 쏠리기보다는 미국의 ‘선처’에 목을 매는 신세가 됐다. 문재인 정부도 친중(親中) 노선을 내세우기 어려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다. 중국 때리기가 미국식 동아시아 질서와 ‘팍스 아메리카나’ 유지의 방편으로 사용되는 셈이다.

이번 일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중국은 아직 멀었다는 것. 2050년까지 미국을 앞서겠다는 중국몽(中國夢)은 말 그대로 꿈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그것이다. 중국의 국력이 미국의 절반만 돼도 한국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어느 편에 붙을지, 국가적 고민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날이 우리 자식 대까지도 올 것 같지 않다.

만에 하나 중국의 국력이 미국과 어깨를 겨룰 만큼 커진다면 우리로선 더 불행한 시나리오의 시작이다. 고래(古來)로 중국은 한국을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거둔 적이 없다. 삼국시대 이래 20회 이상 침공했으며 힘이 쇠한 청조(淸朝) 말에도 조선에 대한 영토적 욕심을 드러냈다. 오죽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을까.

제국이 되려면 군사력과 경제력 외에 문화의 힘과 설득력 있는 정치적 가치, 대외정책의 정당성을 아우른 ‘소프트 파워’도 갖춰야 한다. 중국은 그게 부족하다. 이 때문에 큰 나라지만 우방이 거의 없다. 지구 둘레의 반이 넘는 기나긴 국경선을 맞댄 14개국 대부분과 국경분쟁 등을 겪고 있다. 자기중심적 편협한 세계관을 강요하는 중국이 한국의 우산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미국에서 트럼프 같은 ‘황제’가 출현한 것을 제국 몰락의 서곡(序曲)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주먹을 휘두르며 미국 최고의 강점인 소프트 파워를 훼손하고 보이지 않는 보호주의 장벽, 심지어 멕시코 국경에는 보이는 장벽까지 쌓는 황제 말이다. 제국은 관용을 잃고 벽을 쌓을 때 몰락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럼에도 역시 우리 자식 대까지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은 동맹 따위는 엿 바꿔 먹을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이른바 ‘트럼프 리스크’다. 미국이 대통령 한 사람 뜻대로 되는 나라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70년 혈맹의 연대감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태도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조치 해제 검토’ 발언은 그렇지 않아도 ‘한미 동맹은 돈이 안 된다’고 보는 트럼프의 경고까지 불러왔다. 미국 조야(朝野)에선 현 정부가 한미일 삼각 체제를 이탈해 북중러 체제를 기웃거리려 한다는 의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문재인-트럼프 정부가 짜고 치는 듯이 ‘동맹의 자살’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설사 북한 핵 문제가 해결돼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된다고 해도 한미동맹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중국은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없는 나라고, 중일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홀로 설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트럼프가 아니꼬워도 이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것이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이라크전#미중 무역전쟁#팍스 아메리카나#중국 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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