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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北 굴신과 공갈 속 ‘우리식 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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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北 굴신과 공갈 속 ‘우리식 비핵화’

이철희 논설위원 입력 2018-10-12 03:00수정 2018-10-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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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북한의 핵신고를 미루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6·25 종전선언을 맞바꾸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미국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는 아마도 처음으로 외교수장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발언이 아닐까 싶다. 강 장관도 “우리 내부의 협의, 미국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으니, 이 발언을 두고 다시 “말이 앞섰다면 죄송하다”며 번복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향후 북-미 협상 결과를 두고 봐야겠지만 북한 비핵화가 신고→검증→폐기라는 일반적 절차대로 흘러갈 것 같진 않다. 당장 미국에서도 핵신고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 봐선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쯤에서 북한 외교의 승리를 점쳐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굴신(屈身)과 공갈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자기네 방식을 관철해왔다. 특히 거부를 분명히 한 사안에 대해선 대화의 파탄도 불사했고, 미국이 끝내 손들게 만들었다. 백악관에서 아시아정책을 담당한 마이클 그린이 일찍이 털어놓은 그대로다. “북한은 미국의 전략을 망쳐놓는 데 불가해(不可解)한 능력을 지녔다.”

그간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사라진 단어만 살펴봐도 북한의 외교 성적은 놀랍다. 5월 북-미 정상회담 취소 소동까지 야기하며 북한이 삭제 대상 목록에 올린 단어는 ‘리비아식 해법’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였다. 리비아식 해법은 진작 사라졌고, CVID도 어느덧 다소 생뚱맞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로 바뀌었다.

북한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핵 신고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7월 초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나왔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또다시 취소 소동이 벌어진 뒤 폼페이오의 4차 방북이 이뤄진 지금, 미국 행정부 누구도 핵신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동의했다는 ‘새로운 방식’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적은 없다. 다만 ‘핵개발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와 엄연한 핵보유국인 북한은 다르며, 미국의 이전 행정부가 써먹다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일관된 주장에서 유추할 수밖에 있다.

북한은 우선 이미 보유한 핵무기고(핵탄두, 핵물질, 미사일)와 핵능력 확장수단(생산·개발시설)을 철저히 분리한다. 이미 핵무장을 완성한 이상 핵시설은 포기할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주동적 폐기 이후 검증 허용’ 순서로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핵무기는 상호 군축(軍縮)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속셈인 듯하다.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 핵사찰과 전략자산 전개 금지, 핵우산 공약 폐지, 주한미군 철수 또는 위상 조정까지 염두에 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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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각 비핵화 단계에는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 같은 상응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종전선언도 이뤄지지 않은 지금, 핵신고 요구는 대북 선제공격 목표물의 좌표를 찍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리용호 외무상이 유엔에서 수없이 ‘신뢰’를 내세우며 “일방적 핵무장 해제는 없다”고 강변한 이유다.

이런 ‘북한의, 북한에 의한, 북한을 위한 비핵화’는 먹혀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적극 동조해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우리 정부마저 암묵적 수긍을 넘어 미국 설득에 나선 분위기다. 미국은 불만이겠지만 당장 ‘트럼프 리스크’부터 걱정이다. 북한이 내밀 이벤트에 혹하기 쉽고 주한미군도 연합훈련도 돈 문제로 여기는, 독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대통령이니 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영변 핵시설 폐기#6·25 종전선언#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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