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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수줍음 많은’ 조명균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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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수줍음 많은’ 조명균을 위한 변명

이철희 논설위원 입력 2018-08-17 03:00수정 2018-08-1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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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13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북측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또다시 ‘회담 공개’를 들고나왔다. 아예 ‘회담 문화’를 바꾸자는 거창한 주장까지 내세우며 “골뱅이 갑(껍데기) 속에 들어가서 하는 것처럼 제한되게 하지 말고 투명하게 공정하게 알려질 수 있게 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제가 수줍음이 많아서 말주변이 리 단장보다 많이 못하다”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리선권은 “그러면 북측 기자들이라도 놔두자”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조 장관은 “그러면 남측 기자들한테 혼난다”며 엄살을 떨어야 했고, 리선권은 못 이기는 척 “다음부터는 꼭 기자들 있는 자리에서 하자”고 물러섰다.

리선권은 과연 공개 회담을 원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남측 대표를 군색한 처지로 몰고 남측 언론을 은근히 조롱하기 위해 회담 때마다 으레 써먹는 수법일 뿐이다. 리선권은 1월, 6월에도 같은 주장을 했다. 남측이 무슨 책잡힐 일을 했는지, 회담을 비공개로 해야 할 말 못할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측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쩔쩔매듯 받아줘야 하는 남측 대표의 처지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북측 주장대로 회담을 공개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과거 남북 대화 역사에서 벌어진 의도된 불상사만 떠올려 봐도 그 결과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1972년 9월 7·4공동성명 발표 2개월 만에 북한 적십자 대표단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6·25전쟁 이후 최초로 서울을 방문한 북측 대표단은 연도에 몰려와 손을 흔드는 수십만 인파의 열띤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서울을 떠날 때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들이 차창 밖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TV로 생중계된 북측 대표 윤기복의 개막 연설 때문이었다. 그가 연설에서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 “영광스러운 민족의 수도 평양” 운운하자 항의전화 수백 건이 방송국과 경찰서에 빗발쳤다. TV 중계는 박정희 정부가 북측 인사의 언행이 우리 국민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라는 계산 아래 결정한 것이었고, 그 기대대로 사회 분위기는 일순간 희망에서 분노로 돌변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1994년 3월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에 열린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 양측 간에 거친 말들이 오간 끝에 북측 대표 박영수는 이렇게 위협했다.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한반도를 소용돌이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빠져들게 만든 ‘서울 불바다’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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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박 장면은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북한의 막말에 여론은 들끓었고 여당에선 “바보같이 당한 남측 대표를 경질하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동안 회담 화면을 공개하지 않던 관례를 깬 것은 김영삼 정부였다. 폐쇄회로(CC)TV에 찍힌 54분 회담 중 자극적인 2분 40초 분량의 테이프를 방송사에 넘겼고, 방송사는 반말 섞인 격앙된 1분을 편집해 내보냈다.(김연철 ‘70년의 대화’)

이렇듯 회담 공개는 판을 깨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움직일 여론이라는 게 없는 북측 대표라고 자유로울까. 북측 회담일꾼의 신경은 온통 뒤통수에 몰려 있다. 회담은 오로지 1인의 관객, 즉 수령을 향한 연극일 뿐이기에. 그래서 진짜 속내는 카메라도, 마이크도 없는 사각지대에서 나온다. 안 보이는 곳에선 구걸에 가까운 읍소도 불사한다. 앞말 다르고 뒷말 다른 북측의 허튼 수작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이제 젊은 수령의 시대에도 변함이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남북 고위급 회담#조명균 통일부 장관#리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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