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62〉사채업자 ‘식리인’의 폐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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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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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백성들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채(私債)가 특히 심합니다. 흉년에 가난하고 초췌한 백성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마침내 모두 부잣집으로 몰려가서 사채를 빌려 두 배의 이자로 갚고 있습니다. … 만약 갚지 못하고 본인이 먼저 죽으면 기필코 다시 그의 자손과 친족에게 거둡니다.”

―‘승정원일기’ 1725년 7월 16일

조선은 대출사업이 매우 성행했던 나라다. 조선 초기부터 쌀이나 비단 등으로 대출사업용 펀드(대금)를 조성했고 18세기부터는 화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출자금 조성 행위를 ‘입본(立本)’이라고 하고, 대출사업을 칭하는 용어는 급채(給債) 방채(放債) 흥리(興利) 식리(殖利) 등이 있으나 식리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대출이자를 ‘이식(利息)’이라 하고, 50%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 대출사업자의 공사(公私)에 따라 공채(公債)와 사채(私債)로 구분했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를 ‘흥리인’ 혹은 ‘식리인’이라 불렀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출사업은 관에서 주도했다. 지방관들이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민간에 대출해 이자 수입으로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였는데, 특히 지역의 방위비 조달을 위해 가장 많이 활용됐다. 부족한 지방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대안이 없었으므로 지방관의 대출사업은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고, 탐관오리와 민간인들의 결탁으로 많은 폐해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대출금리 책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 초기부터 다소 예외는 있었으나 공채와 사채의 대출금리는 각각 20%와 50%가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대출금리와는 달리 ‘무명자집’에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대출금리가 연 100%에 이르고 1년 후 원금과 이자를 합친 금액을 다시 원금으로 계산하여 연 100%의 이자를 매긴다. 향도미(香徒米)라는 상품은 쌀을 대출받는 방식인데 금리가 200%에 이른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일반 서민들의 고통이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사위 윤사로(尹師路)와 한명회, 윤필상 등의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승려들과 사마시 출신들(생원, 진사)의 자치 협의기구인 사마소(司馬所)도 사채업에 종사했다. ‘허생전’의 등장인물 변승업 역시 사채업으로 많은 돈을 모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목민심서’에 등장하는 전라감영의 아전인 최치봉(崔致鳳)은 가장 대표적인 사채업자였다. 그는 전라도 전체 53개 읍에 2, 3명의 아전들을 포섭하여 스스로 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매년 수십만 냥을 조성하고 자신이 포섭한 아전들에게 지원하여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를 하게 했다. 특히 청렴하고 법을 잘 지키는 관리들은 중상모략하고 탐관오리들인 경우 그들의 비리가 담긴 기록물들을 모두 빼내어 삭제해 주면서 자신의 위상을 세웠다. 그러던 중 이노익(李魯益)이 전라감사로 부임한 지 10일 만에 최치봉을 잡아들여 죄를 묻고 곤장을 친 후 3, 4개 고을을 옮겨 다니며 수감하였는데 결국 고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산은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끝내 허물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사기만을 일삼는 아주 간악한 자는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악덕 사채업자인 최치봉을 제시한 것이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식리인#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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