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VOA의 공짜 힌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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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미국 워싱턴 백악관 길 건너에 초특급 호텔이 하나 있다.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워싱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소유라는 건 이 호텔 1층 로비 바에 있는 TV 화면을 봐도 안다. 몇 차례 들른 적이 있는데 갈 때마다 수십 개의 TV가 일제히 폭스뉴스를 틀고 있었다. 한번은 호텔 종업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Welcome to Trump world(트럼프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며 웃었다. 트럼프에게 우호적인 폭스뉴스 대신 CNN, MSNBC처럼 트럼프가 하루빨리 탄핵되길 바라는 방송을 왜 틀겠느냐는 표정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워싱턴 사람들은 ‘먹고살려면’ 뉴욕타임스(NYT)를 정독해야 했다. 특히 외교안보 뉴스는 NYT 1면에 나면 하루 이틀 후 백악관 대변인이 해당 내용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바마와 이념 궁합이 맞았던 NYT가 백악관 소식을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독립성 논의와는 별도로 미 언론은 특정 정권과 정부의 거울 노릇을 할 때가 많다.

그런데 미 언론 중에서도 백악관 주인에 상관없이 워싱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꾸준히 보여주는 매체가 있다. 미국의소리(VOA·Voice of America) 방송이다. 미 행정부가 자기 생각을 외부에 알리려 돈을 대고 관리하는 국영방송이기 때문이다.

VOA가 요즘 우리 공직자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된다. 북-미 간 비핵화 프로세스가 시원치 않자 북한, 더 나아가 한국에 부정적이거나 불리한 기사가 미 행정부발로 보도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VOA가 최근 보도한 북한산 석탄의 한국 반입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VOA가 뭘 알고 이런 보도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무부 관계자가 정부의 남북협력기금 800만 달러 대북 집행 가능성에 대해 “비핵화를 어렵게 한다”고 했다는 VOA 보도에 대해선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까지 나섰다. 김 대변인은 12일 브리핑에서 “실무자 수준에서 나온 답변”이라고 일축했다.

외국 매체 보도를 정부 관계자들이 다 수용하거나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VOA의 경우는 좀 다르다. 미 행정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힌트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북-미 간 비핵화 신경전이 하루하루 펼쳐지는 요즘엔 더 그렇다.

사실 800만 달러 남북협력기금은 국내 문제라 미국에 대놓고 물어보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하기도 어렵다. VOA는 국무부 관계자가 옆에서 읽어주듯 속내를 전하고 있다. “대북 압박을 성급히 덜어주는 건 (비핵화라는) 그 목표 달성 가능성을 줄어들게 할 수 있다(Any premature relief in economic or diplomatic pressure would diminish the chances that we’ll achieve that goal).” 매일 정부 차원에서 현안별 언론 대응(PG·Press Guidance)을 조율하는 미국 특성상 어디에 물어봐도 이 이상의 공식 답변은 듣기 어렵다. 테드 포 공화당 하원의원이 미 의회의 추가 대북제재 움직임을 가장 먼저 밝힌 것도 VOA 인터뷰에서였다.

일개 외국 매체가 우리 정부에 이래라저래라 하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정부 말대로 워싱턴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100% 다 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나라도 비핵화 논의에 참고할 힌트가 있다면 그게 언론 매체든 사람이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시점이다. 정부에서 김정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려고 매일같이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를 분석하다 대놓고 화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voa#북한 비핵화#남북협력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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