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당신 잘못이 아냐”…‘미투’ 폭로 서지현 검사, 5개월 이후

  • 여성동아
  • 입력 2018년 6월 22일 10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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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 7월호 첫 지면 인터뷰]


지난 1월 현직 검사의 성폭력 피해 고백은 우리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는 창원지검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를 일곱 번째 파워우먼으로 만났다. 서 검사가 방송이 아닌 지면 인터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는 뜻) 운동’은 지난해 10월 미국 여배우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의 성폭력을 소셜 미디어에 폭로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한국판 미투 운동의 시작은 창원지검 통영지청 서지현(45) 검사였다. 서 검사는 1월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8년 전인 2010년 10월 30일 장례식장에서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이던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이후 부당한 사무 감사를 근거로 2015년 8월 통영지청으로 발령 조치하는 인사 보복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서 검사의 고백에 용기를 얻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각계 저명인사들의 과거를 폭로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문재인 대통령은 2월 26일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며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 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고소 없이도 수사할 것”이라는 후속 조치 방침을 밝혔다. 또 서 검사의 폭로 이틀 만이던 1월 31일 검찰 내부에는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이하 조사단)’이 꾸려졌고, 안 전 국장은 자신이 성추행한 서 검사에게 인사상 불이익 처분을 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4월 25일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서지현 검사를 5월 28일과 6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만났다.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한 서 검사는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을 33기로 수료했다. 2004년 대전지검 홍성지청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인천지검, 서울북부지검, 수원지검 여주지청을 거쳐 2015년 8월부터 창원지검 통영지청에 근무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과 성차별 극복에 이바지한 공로로 얼마 전 ‘들불상’을 수상하셨지요.

들불상은 들불 야학을 설립해 운영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분투하다가 돌아가신 7인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매우 뜻깊은 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 너무나 과분한 상이라 제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됐지만, (성폭력) 피해자로서 움츠러들고 두려워하는 모습보다는 당당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큰 용기를 내어 받게 되었습니다.

최근 ‘마녀의 법정’ ‘비밀의 숲’ ‘검법남녀’처럼 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많아졌는데, 왜 그럴까요.

극 중 검사가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인 듯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드라마처럼 멋있게 생활하진 못해요. 업무량이 굉장히 많아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또 상명하복 문화가 뿌리 깊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 경우만 보더라도 초임 때는 한 달에 4백~5백 건을 처리했고, 최근까지도 수사 지휘 등을 맡아 한 달에 4백 건 이상을 처리했습니다.

현직 판사가 집필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 판사나 ‘무법변호사’의 강연희(차정원) 검사 헤어스타일이 서 검사를 모델로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제가 모델로 언급된 것이 매우 민망합니다만, 검사에 대한 경직된 선입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웃음).

올 초 ‘뉴스룸’ 출연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뉴스룸’ 출연을 결심했을 땐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두려움이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후 많은 분들이 “Me Too”를 외쳐주셨을 때 저에게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위드 유(With You)”로 들렸고 덕분에 큰 힘이 됐어요. 제 ‘Me Too’ 역시 그분들에게 ‘With You’가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다른 분들에게도 심각한 2차 가해가 이어져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조사단에 수회에 걸쳐 “2차 가해 때문에 피해자들이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고, 입을 연 피해자들도 너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아 안타까웠어요.

2010년으로 돌아가보죠. 장례식장에서 안태근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의 옆자리에 어떻게 앉게 됐습니까.

장례식에 참석한 검사들 중 제가 낮은 기수였어요. 서열을 중시하는 검찰의 조직 문화상 원래는 말석에 앉았어야 했는데, 누군가 저를 밀어 그 옆에 앉게 됐어요. 당시 안 단장 옆에 법무부 장관이 있었는데, 대체로 높은 분 옆자리에는 여성을 앉히는 일종의 관례(?) 때문에 저를 그쪽으로 밀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 테이블에 여검사는 저 혼자였어요.

대전지검 홍성지청의 초보 검사 시절.
대전지검 홍성지청의 초보 검사 시절.

피해를 당한 후 어떻게 대처했나요.

당시 서울북부지검 특수부에서 일했는데 사무실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고 쪽잠을 잘 정도로 업무가 바빴고,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 피해자에게 과도한 관심과 2차 가해가 쏟아지는 것을 봐왔기에 선뜻 고소를 하거나 감찰에 이야기하지 못하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동료 임은정 검사가 서 검사가 당한 일을 공론화하려고 했었다죠.

그 일로 고민하는 와중에 사내 메신저를 통해 임은정 검사로부터 메시지가 왔었어요. ‘OOO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느냐? 어떤 여검사가 안 단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는데, 목격한 사실이 있느냐?’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임 검사와는 모르는 사이였어요. 그분이 감찰 담당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임 검사에게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당시 제가 근무하던 지청의 부장검사와 수석 여검사를 찾아가 제가 겪은 일을 상의했더니 그분들이 검사장을 통해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주기로 해서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 후 어떠한 사과나 연락도 없었습니다.

안 전 국장 측은 5월 18일 1차 공판에서 “서 검사의 근무 평가 순위가 좋지 않았고 직전 사무 감사에서의 검찰총장 경고, 인천· 여주 등 수도권 지역 연속 근무, 검사 인력 사정 등으로 통영지청 발령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서 검사가 통영 발령을 성추행 이후 인사 보복으로 판단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먼저, 아는 직원을 통해 “법무부에서 제 인사가 여주 스테이(여주지청 유임)로 진행됐는데, 결재 과정에서 안 국장이 저를 반드시 날려야 한다고 주장해 인사를 약간 딜레이해가면서 저를 날릴 곳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력검사의 경우 보통 7년 차 정도일 때 지청에 보내서 어려운 사건도 처리하고 후배들의 사건 처리나 고충에 조언도 하는 역할을 맡긴 후 원하는 임지로 발령 내주는 방식으로 경력검사 제도가 운영돼왔는데, 저는 여주지청 경력검사로 근무한 직후 다시 통영지청 경력검사로 발령이 났어요. 경력검사 제도가 생긴 이래 지청 경력검사로 2번 근무한 검사는 제가 유일하다고 들었습니다.제가 올해 15년 차 검사인데 제 연차에도 전혀 맞지 않는 발령이었고, 통영은 경력검사 자리가 하나뿐이에요. 제가 발령받았을 때 이미 후배 검사가 경력검사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통영에 경력검사가 2명 배치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죠. 이렇게 이례적인 발령을 낸 것은 검찰에서 나가라는 의미인데, 지금까지 제 발로 나가야 할 만큼 업무에 소홀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근무하는 지청에서 매번 실적이 좋은 검사로 인정받았어요(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서 검사는 법무부 장관 표창을 2회 받았고, 대검 우수 사례로 10여 회 선정됐다. 통영지청 발령 직전인 2014년 6월부터 1년간은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연수를 한 바 있다).

그럼에도 서 검사를 통영지청으로 발령 낸 근거가 뭐였나요.

당시 그 근거가 된 것이 2014년 4월 제가 근무하던 여주지청에 대한 서울고검의 사무 감사 결과라고 했어요. 그런데 추후 조사단이 발표한 바로는 사무 감사와는 큰 관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사무 감사 결과는 검사로 근무해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부당하다고 느낄 정도로 틀린 부분이 많고, 매우 사소한 것을 가혹하게 지적했어요. 그 정도 지적으로 제게 ‘검찰총장 경고’를 준 것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에요. 당시 대검 감찰본부에 있던 검사에게 “대검에서는 (제게) 경찰총장 경고를 하는 것이 지적 사항에 비해 가혹하다고 했는데, 사무 감사를 직접 진행한 서울고검에서 강력히 주장해 경고 조치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지난 1월 말 꾸려진 ‘조사단’의 단장이었던 조희진 (서울동부지검) 검사장은 2014년 당시 서울고검 차장으로 재직하며 제 사무 감사를 결재한 장본인이에요. 그때 사무 감사와 경고 조치를 한 경위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마지막까지 조사단장직을 유지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조사단은 제 사무 감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사라면 대부분 제 주장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무 감사 지적 사항이 맞다고 하더라도 ‘사무 감사에 따른 총장 경고’ 정도로 저와 같은 징계성 인사가 이뤄진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안 전 국장은 여주지청 근무가 수도권 근무여서 지방 발령 대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검찰 내에서 여주는 수도권이 아닌 지방 근무로 간주하는 곳이에요. 저는 여주지청 이후 수도권 근무가 가능한 대상이었던 거죠. 게다가 이번 조사 종료 후 제 임지가 통영으로 결정되기 전 10여회 남짓 바뀐 걸 알게 됐습니다(조희진 검사장은 지난 6월14일 사표를 제출하고 검찰 내부 통신망에 “많은 반대와 이견에도 불구하고 검찰 조직 내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 처분을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직권남용으로 기소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 법무부 장관에게 피해 사실과 인사의 부당함을 메일로 알리고 면담을 요청했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면담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나요.

인사 보복을 받은 이후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검사이면서 자신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는 제대로 구제하지도, 입을 열지도 못한다는 자괴감이 저를 괴롭혔어요. 제가 면담 요청을 하기 전 임은정 검사가 총 3회에 걸쳐 검찰 내부 게시판과 ‘한겨레신문’ 인터뷰 등을 통해 제가 당한 일을 언급한 터라 법무부에서도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법무부에는 어떤 대책이 있는지 알고 싶었고, 어떻게든 검찰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수장인 법무부 장관에게 피해 사실을 명확히 알리고 면담 요청을 했던 겁니다. 그 후 법무부 장관이 지정한 검찰과장과 면담하며 피해 사실 및 불합리한 인사 등 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던 내용들, 거기에 안 전 국장이 관련돼 있다고 판단하게 된 근거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대책을 문의했죠. 하지만 법무부에서는 어떤 대책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제게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기에 “인사 경위 등에 대한 사실 확인을 원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어요. 또 “우리 회사가 어디로 보내달라고 한다고 보내주는 곳도 아니고, 내가 이런 피해를 입었으니 보상 차원에서 어디로 보내달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그럼에도 법무부에서는 제가 면담 당시 “진실 규명을 원하지 않고 인사 요구만 했다”고 발표했어요. 면담 당시 제가 녹음해둔 녹취 파일도 갖고 있는데, 법무부에서 사실과 다르게 저를 마치 ‘피해를 미끼로 인사를 요구한 검사’처럼 만들어 너무도 마음이 아팠어요.

면담 5개월 뒤인 지난 1월 29일, 검찰 내부 망에 직접 8년 전 일과 그간 느낀 점을 소설 형식으로 작성한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제하의 글을 게시했어요. 그 이유가 뭔가요.


생방송 뉴스에 직접 출연한 걸 보고 제가 굉장히 용기 있고 활달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평소 조용하고 좀 소극적인 성향이라, 만일 법무부에서 “사실 확인을 해보았더니 억울하게 발령받은 것은 맞지만, 안 국장이 이미 검찰에서 나갔고 고소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저에게 설명만 했어도 그냥 참고 근무했을 겁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어떠한 조사도, 조치도, 연락도 없는 것을 보고 더는 참기 어려웠어요. 성실히 근무만 하면 명예가 회복되고 억울함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 너무나 어리석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사직서를 내려고 했어요. 그러나 검찰의 이런 상태로는 검찰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진정 달라져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검찰로 거듭났으면 하는 소망으로, 후배들이 다시는 저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런 글을 올리게 됐죠.

그리고 그날 바로 ‘뉴스룸’에 출연했어요. 사전에 계획했던 일인가요.

제 글이 검찰 게시판에 올라간 후 지인을 통해 jtbc와의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당시에는 그 글만 올리고 사직서를 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두렵기도 해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몇 시간 후 법무부에서 ‘서 검사 인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제 주장을 허위로 치부하고 그대로 덮어버리려 했기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 출연을 결심하게 됐죠. 사실 저희 집은 공중파 채널만 나와 그때까지 ‘뉴스룸’을 본 적이 없어요. 손석희 앵커와도 인터뷰 시작 몇 초 전에 처음 대면했고요. 그때 저는 단 한 사람의 피해자라도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제 말을 듣고 위안을 얻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 일을 당한 후 약 7년 동안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지난해 말 심리 상담을 해주시는 분에게서 처음으로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줬는지 몰라요.

안태근 전 국장은 1차 공판에서 “만취 상태여서 기억이 없으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했는데, 서 검사에게 직접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안 전 국장 측은 또한 ‘법무부에서 검사 인사 실무를 맡은 이모·심모 검사에게 “서 검사를 반드시 날려야 한다”고 진술했다’는 공소사실을 부인했습니다. “두 검사는 피고인의 특별한 지시 사항이 없었다고 반복해서 진술하고 있고, 실무에 관여한 박모 수사관 등도 피고인의 부당한 지시가 없었다고 진술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제가 거대 권력인 검찰을 상대로 싸우는 형상이 됐는데, 제 유일한 힘은 진실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검사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방송에까지 나간 건 분명히 제가 전해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검찰이 수사 의지와 능력이 있었다면 충분히 관련자들의 진술을 이끌어내고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매우 안타깝습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검찰이 수사 의지와 능력이 있었다면 밝힐 수 있었다, 이런 의미인가요.

대검은 제 폭로 이후 성폭력 전담 여검사들로 구성된 조사단을 발족했는데, 제 성추행 사건은 고소 기간이 이미 지났어요. 게다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진술하고, 가해자가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지만 사실이라면 사과하겠다“고 인정한 상태라 더 이상의 진상 규명이나 수사를 해야 할 중요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후 이뤄진 인사 보복 등에 대한 진상 규명이 중요 사항이죠. 그 수사를 위해서는 특수 수사 경험이 있는 검사들로 수사단을 구성해 신속하게 골든타임 내에 수사를 진행했어야 합니다. 안 전 국장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최측근으로 소위 ‘우병우 사단’을 구성한 사람이고, 아직도 검찰 내부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관련자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수사 의지와 능력이 절실한데 수사 의지도, 능력도 없는 수사단도 아닌 조사단을 꾸려 수사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 그와 같은 허위 진술을 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뿐 아니라 검찰 전체의 개혁을 위해 그들이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아지를 안고 친언니와 정겹게 어깨동무를 한 중2 때의 서 검사(오른쪽).
강아지를 안고 친언니와 정겹게 어깨동무를 한 중2 때의 서 검사(오른쪽).

아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통영지청 발령 이후 육아에 어려움이 있었을 듯합니다.

사실 육아에 대한 고충이 가장 컸어요. 친정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시부모님도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육아 도움을 받을 곳이 전혀 없어요. 항상 입주 아주머니들 도움으로 아이를 키웠는데, 정말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담배 연기 자욱한 불법 도박장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석 달 내내 맨밥만 먹이기도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약을 복용하게 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어요. 그럼에도 아이를 입주 아주머니에게 맡긴 채 통영에 가서 근무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몹시 힘들었어요. 아이 때문에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왔는데, 통영에 가는 대중교통이 버스밖에 없고 버스로 약 5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죠. 원래 허리 디스크가 있어 장시간 버스에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다 목 디스크에 공황장애까지 발병해 치료 중에 있습니다(서 검사는 통영 발령 후 남편과 주말 부부로 지냈다. 현재는 질병휴직 중이다).

왜 검사가 됐습니까.

처음에는 막연히 정의를 실현하는 법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법연수원생 시절 검사 시보로 근무해보니 검사 생활이 너무 고돼 보여 망설여지기도 했죠. “너처럼 여리고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무슨 검사를 하냐”고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시보 때 지도검사님의 “검사는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다”라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았고, “범죄자도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보다, 적극적으로 정의를 좇아 일하는 검사가 훨씬 보람 있다”는 부친의 조언을 듣고 검사가 됐어요.

검사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입니까.

제가 꿈꾸던 검사는 잘나가는 검사가 아니라, 누구보다 따뜻하고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검사였어요. 바쁘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부족하지만 그런 검사가 되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어요. 검사 일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검사는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를 부인하는 피의자, 고통에 괴로워하는 피해자, 각자의 말을 하는 참고인 사이에서 당사자들을 최대한 설득하고 증거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진심으로 당사자들을 대하려고 노력했고, 그들에게 제 진심이 닿아 진실이 밝혀지고 피해가 회복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죠. 당사자들로부터 감사 편지도 많이 받았어요.

이화여대 법학과에 입학하던 날.
이화여대 법학과에 입학하던 날.

서 검사의 용기가 미투 운동을 촉발했지만 미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발이라는 것 자체에 과격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통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있었으면 합니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시기가 영국은 1918년, 미국은 1920년, 스위스는 1971년이에요.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는데, 곧 이런 미투가 필요한 시대였다는 것이 깜짝 놀랄 일일 정도로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내부고발자에 대한 2차 가해 중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동료들의 외면이라고 합니다. 서 검사의 경우는 어떤가요.

법무부, 조사단 등에서 저에 대한 허위 발표를 거듭하고 기자들에게 저를 음해하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검찰 간부들이 저와 친하게 지내던 검사들에게 비꼬는 투로 말을 하고, 저처럼 검찰을 해하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교육시킨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조사단에서 저와 친했던 검사들은 중요 사항이 아닌데도 전부 소환해서 힘들게 하고, 간부급인 직접 목격자 등은 부르지도 않고 서면 조사만 했대요. 검찰 내부에서 ‘서 검사에게 한마디라도 하면 불려가서 조사받는다’고 소문이 나서 누구도 저에게 연락하길 꺼린다고 해요. 검경 수사권 조정도 저 때문에 불리해졌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들었어요. 예상했던 일이지만 저를 배신자 취급하는 검찰이 야속하고, 친했던 검사들이 고통 받는 것이 몹시 괴로웠어요. 정말로 검찰을 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국민들이 수사권을 조정하라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되묻고 싶어요. 제 자신을 위해 가장 행복한 방법을 찾으려 했다면 그냥 사표 내고 조용히 살고 있겠죠. 하지만 검찰이 제대로 바뀌기를 바라고, 진심으로 검찰을 사랑하기에 입을 열 용기를 낸 겁니다.

서 검사가 정치를 하려고 미투를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검찰 내부에서는 제가 “인사를 잘 받으려고 꾸민 일이다” “정치인이 되기 위해 유명해지려고 미투를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돈도, 사회적 지위도 한순간의 꿈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루하루 최대한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자’고 결심했거든요.

만약 2010년 그 현장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 같나요.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해봤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강력하게 항의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한들 이후의 상황이 과연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당시 사회 분위기와 소극적인 제 성격상, 시간을 되돌려도 그때와 똑같이 그냥 피하려고 애쓰는 것 외에는 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요.

서 검사가 미투를 외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과거의 피해자가 안전하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오고 다시는 저와 같은 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과는 달라진 모습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습니다. 강자도, 약자도, 여성도, 남성도 모두 함께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 피해자, 갑질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먼저 가해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당신이 당신 인생의 주인공이듯,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돈, 권력, 성별 등 그 어떤 것과 관계없이 모두의 삶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더는 약자라고 함부로 대하고, 모욕과 공포로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고요. 그리고 피해자들에게는 ‘결코 당신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지극히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힘내라’는 말보다는 2차 가해에 대한 엄중한 처벌 등 대책을 마련해 더는 피해자들이 괴롭힘을 당할까 겁먹거나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적 여건이 조성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고, 건강과 명예가 회복돼 다시 검사로서 정상적으로 근무했으면 합니다. 제가 제대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많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잃을 것이라는 많은 분들의 걱정을 공감하기에 힘들더라도 잘 이겨내기로 마음먹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겁니다. 제 모습을 보며 단 한 명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가 예전과 같이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은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을 각오하고 있어요. 하루빨리, 피해자들이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헤어 미소(김청경헤어페이스), 메이크업 박새롬(김청경헤어페이스)

<이 기사는 여성동아 2018년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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