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폭파 쇼’에 나선 24일, 오전 폭파를 마치고 찾아온 점심시간 다국적 기자단의 눈에 군 막사 처마에 달린 제비집이 포착됐다. 한 기자가 “제비는 방사능에 민감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북측 관계자는 “그만큼 (이곳에) 방사능이 없다는 얘기다. 방사능에 민감한 개미도 여기에 엄청 많다”고 답했다.
3번 갱도 앞 개울에선 동행하던 북한 관영 조선중앙TV 기자가 한국 취재진에 개울물을 마셔보라며 얘기했다. “파는 신덕샘물은 pH(산도) 7.4인데 이 물은 pH 7.15라 마시기에 더 좋다. 방사능 오염은 없다.”
북측은 이날 방사성물질 유출 가능성과 관련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기자들의 질의에 “문제없다”는 말만 수차례 반복했다. 풍계리 일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신병’이 돈다는 소문을 의식한 듯했다. 국제사회는 갱도 지하에 축적된 방사능 오염물질이 외부로 흘러나올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북한은 풍계리가 안전함을 몸소 보여주려는 듯했다. 북측 관계자뿐만 아니라 기자단에 방호복을 지급하지 않았다. 공사현장에서나 쓸 법한 노란색 안전모만 하나씩 지급됐다. 그 대신 실제 위해성을 측정할 방사선량 측정기는 압수했다.
일각의 우려와 달리 이번 폭파로 인한 방사성물질 유출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갱도 내부 암반에 구멍을 뚫고 폭약을 설치해 터뜨리는 내폭 방식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2∼4번 갱도를 폭파할 때 중간중간 상세히 설명을 하며 기자단의 이해를 도왔다. 폭파 전 갱도 안을 공개하고, 폭파 이후 현장을 다시 보여주기도 했다. 당초 약속했던 전문가 참여를 거부한 것을 의식한 듯 ‘검증에 성의를 보였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25일 공개된 폭파 영상을 보면 북한이 핵실험장 내 갱도를 재사용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폭파하진 않았을 거라는 추측에 무게가 실린다. 갱도 입구 폭파 수준으로 폐기 흉내만 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북한은 갱도 폭파에 앞서 전체 길이가 1∼2km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갱도 중 입구 주변만 공개했다. 전문가들은 1∼2km에 달하는 갱도 내부를 모두 폭파해 붕괴시켰다면 후폭풍이 너무 커서 기자단이 폭파 현장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관람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측 관계자는 “5차례 성과적 핵실험을 한 갱도”(2번 갱도) “핵실험을 위해 만반의 준비가 된 갱도”(3번) “큰 핵실험을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게 특별히 준비해뒀던 갱도”(4번) 등으로 각각의 갱도 폭파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비핵화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의미 있는 ‘폭파 쇼’를 보였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풍계리의 마지막 폭파가 있은 지 6시간여 만에 김정은에게 한껏 격식을 차린 공개편지를 보내 정상회담 취소를 통보했다. 화약 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풍계리 폭파 쇼는 빛이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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