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엘리엇에 한 방 먹은 김상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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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1부장
배극인 산업1부장
일본의 유명 여배우 아키요시 구미코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6년 전이었다. 그가 한류 사극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던 게 계기였다. 그는 신하들이 툭하면 “죽여주시옵소서∼”라며 바닥에 엎드리는 장면이 생소했다고 했다. 사무라이 문화의 일본에서라면 정말 목숨을 내놓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은 말과 그에 따른 책임이 무거운 사회다. 일본의 매뉴얼 문화도 ‘책임진다’는 게 무서워 매뉴얼 뒤로 숨은 측면이 있다.

이 일화가 문득 떠오른 건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 개선 잠정 중단 사태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사안들에, 정부는 과연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갖고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어서다. 수십만 기업 식구들과 투자자들의 이해가 걸린 사안들을 ‘일단 한번 해보고’라는 식으로 덤비는 건 아닌지 짚어볼 일이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의 긴밀한 교감 속에 추진됐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8월 외신에 “현대차그룹 순환출자 구조 해소에 대해 현대차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고, 두 달 전 개편안이 발표되자 “긍정적인 방향의 개선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지난달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에 지주회사 전환을 요구하자 “금산분리를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라고 엄호했다. 재계에서 “이번 건은 처음부터 현대차가 아니라 김상조 대 엘리엇의 승부였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엘리엇 편에 선 미국의 의결권 자문사인 ISS가 반대 권고안을 내놓은 후로 김 위원장은 침묵했다.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이 ISS를 따라 줄줄이 반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캐스팅보트를 쥔 2대 주주 국민연금은 의결권을 외부 전문위원회로 넘긴 채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2015년 ISS의 반대 권고에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뒤 홍역을 치른 트라우마 때문이다.

ISS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라지만 과연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국을 관할하는 싱가포르 래플스 플레이스에 위치한 사무소를 방문했던 한 기업인의 말이다. “한국말을 아는 애널리스트 한 명이 한국 상장사들의 수많은 이슈를 대학을 갓 졸업한 보조 2, 3명 데리고 다루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밑에 법률 전문가도, 회계 전문가도 없었다.”

사실은 놀랄 필요도 없다. 원래 ISS 권고안은 컨설팅사 의견처럼 참고만 하면 된다. 하지만 국내 일부 세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ISS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했다. 그 결과 ISS에 ‘의결권 주권’을 내준 채 휘둘리는 상황을 자초했다. 이 틈을 타 엘리엇은 7100억 원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하고 정부를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 위원장은 현대차가 지배구조 개편안 잠정 중지를 발표하자 한 언론에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외국 투기자본에 제대로 한 방 먹은 셈이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는 건 책임 있는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다. 마음부터 바꿔 먹어야 한다.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 학자로서의 의견을 공직에서까지 밀어붙일 일은 아니다. 실현 가능성을 다시 꼼꼼히 따져보고 경우에 따라 기업에 제도적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정교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헤지펀드의 경영권 위협을 간과하고 밀어붙이던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 상법 개정안도 이참에 재검토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기업의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헤지펀드에 역전승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엘리엇#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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