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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진영]태영호의 ‘저팔계 외교관으로 살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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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진영]태영호의 ‘저팔계 외교관으로 살아보니’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입력 2018-05-19 03:00수정 2018-05-2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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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북풍(北風) 덕일까.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가 출간 3일 만에 초판 1만 부가 매진되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최고 존엄’에 대해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한 백두혈통’이라고 쓴 대목이 거슬렸는지 북한은 출간 다음 날 저자를 “천하의 인간쓰레기”라고 욕했는데 이것이 홍보 효과를 냈다.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 인사인 저자는 북한의 외교 비화와 최고 엘리트의 생활 실상을 542쪽 분량으로 증언한다. 외교를 못해도 만회할 길이 있는 정상 국가와 달리 외교를 못했다간 나라가 망하는 북한은 벼랑 끝 외교, 고슴도치 외교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 왔다. 저자는 이를 ‘저팔계식 실용 외교’라고 요약했다. 중국 소설 ‘서유기’의 저팔계처럼 “솔직한 척 어리석은 척 억울한 척하면서 어딜 가나 얻어먹을 것은 다 챙기는 외교”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현성일 박사도 김정일이 이렇게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저팔계처럼 잇속만 챙길 수 있다면 적에게도 추파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저팔계 외교의 성공 사례로 소개한 것이 ‘영국으로 미국 견제하기’다. 2003년 미국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를 첫 상대로 지목하자 김정일은 “다음은 조선 차례”라며 떨다가 영국에 ‘추파’를 던지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칠 것 같다. 영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다. 빨리 런던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공화국기를 띄워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영국이 반대하면 미국이 북한을 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해 8월 북한의 최고 핵 전문가인 리용호가 주영국 대사로 부임해 “‘큰일’(2006년 1차 핵실험) 전까지 2, 3년간 시간을 벌라”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조선이 핵실험을 해도 미국이 때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저자는 “북한 외교의 승리”라고 자평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 외교가 강한 비결로 ‘숙청으로 단련되는 외교력’을 꼽았다. 북한 외교관들은 친선 축구를 할 때도 목숨 걸고 찬다. 유럽 대사관과의 축구 시합에서 전반전에 패하자 북한 외무성 팀은 국가대표팀 선수 3명을 몰래 후반전에 투입했다. 최고 존엄에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져서는 안 되는 경기였다.

북한 외교관의 최대 고민은 자녀 교육 문제다. 해외 발령을 받아도 아이를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다. 쌍둥이도 예외가 아니다. 태 전 공사는 운이 좋았다. 김정은은 측근들이 70, 80대 고령인 점이 못마땅해 학생들을 많이 유학 보내 고급 인재로 키우라고 했다. 그런데 북한엔 인터넷이 없어 해외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없다. 건강검진서도 북한 병원의 문서는 인정을 못 받으니 중국 베이징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다! 결국 “둘이든 셋이든 상관 말고 외교관 자녀를 유학 보내라”고 지시했고, 태 전 공사는 평양에 혼자 떨어져 있던 큰아들을 런던으로 데려와 망명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틱한 자서전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출간 소식에 여당 국회의원들은 “대북 적대 행위”라고 비난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남북 화해 방해하는 태영호를 북송하라”는 청원이 쇄도한다. “북한은 봉건사회”라고 비판하던 그가 모든 문제를 여전히 ‘나라님이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는 21세기 민주사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모든 소동 덕분에 인세 수입은 늘어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기증을 느끼지는 않을까.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태영호#3층 서기실의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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