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카톡·쓰레기통까지…‘사생활 엿보기’ 감시? 보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6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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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참 종이 한 장 차이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조모 씨(43)는 요즘 고민이 늘었다. 몇 년 전만해도 ‘아빠 껌딱지’였던 딸이 올해 들어 부쩍 숨기는 게 늘었다. 예전에는 학교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놨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자기 스마트폰을 아빠가 만지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조 씨는 “부모로서 관여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항상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공부와 삶의 균형)’을 지키려면 우리 아이들에게 일정부분 ‘사생활’ 보장이 필요하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가 혹시나 ‘나쁜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신경이 쓰인다.

아이들이 원하는 사생활의 기준은 무엇일까. 부모의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본보 취재팀은 13, 14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5, 6학년 자녀를 둔 부모 3명 그리고 초등학생 4명과 각각 ‘부모님방’ ‘아이들방’이라는 단체대화방(단톡방)을 만들어 속내를 들어봤다.

● “창피해요” 사생활 경계에 단호한 아이들

“쪽팔리잖아요!”, “저작권(?)이 있잖아요!”

오영아(가명·12) 양과 안보연(가명·11) 양이 거의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방에 있는 서랍이나 일기장, 노트를 부모님이 살펴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4명 중 3명이 10초도 되지 않아 “안 돼요”라고 답했다. “부모님이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오는 건 괜찮다”고 답변하던 아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은 내용을 엿보는 것을 더 싫어했다.

아이들에게 사적인 영역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은 ‘창피함’이다. 한상민(가명·11) 양은 “엄마가 밖에서 있었던 내 개인적인 일을 어딘가에서 듣고 와서 나한테 물어볼 때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맞아요” “저도 그건 좀…”이라며 공감을 표현했다.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창피했던 사건으로 ‘학교에서 삐쳐서 뛰쳐나갔던 이야기’ ‘집에서 울었던 이야기’ 등을 꼽았다. 부모는 대부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 꺼낸 이야기이지만 민감한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 관계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장받고 싶다는 게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부모님의 이견도 참고는 하겠지만 판단은 스스로 하고 싶다”는 것. 기자는 ‘메신저로 욕설을 일삼는 나쁜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부모들은 “문제가 있는 친구라면 나서서 말려야 한다” “아이에게 전후 사정을 물어본 뒤 문제가 있다면 끼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님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결정은 우리가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모든 사생활 보장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사생활 침해 논란을 빚는 ‘위치추적 앱’에 대해 아이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제히 답했다. “우리 안전을 위해 설치하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권주희(가명·11) 양은 “어차피 추적해봐야 맨날 학원에 있을 거라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 사생활 기준 애매모호한 부모들


“저는 일기장은 가끔 본 적이 있네요”, “초반에는 카카오톡 검열을 좀 했었죠.”

부모들은 담담했다. 아이들은 “절대 안된다”고 했던 분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달새’(온라인 닉네임·42·여)는 “아이들의 솔직한 일상을 살펴보려고 일기장을 열어보곤 했다.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니 그래도 안심은 되더라”고 털어놨다. 아이들은 달랐다. 오 양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면 대부분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서툴고 과도한 개입이 자칫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서울 강남에 사는 김선원(가명·12) 군은 요즘 스마트폰만 들면 ‘기숙사 있는 중학교’를 검색하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확인한다며 수시로 방을 뒤졌기 때문이다. 쓰레기통까지 확인할 정도로 간섭이 심해지자 김 군은 부모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부모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윤영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사업본부장은 “부모가 사사건건 개입하기보다 일정 부분 아이의 영역을 보장해줘야 아이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라밸’ 없는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문제점과 대안 ▼

“정말 말 잘 듣는 아이였는데….”

20세 아들을 둔 A 씨(48)는 최근 서울의 상담센터를 찾아 울먹였다. A 씨는 이른바 ‘헬리콥터맘’이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리며 스케줄을 관리했다. 혹여나 나쁜 길로 빠질까 주기적으로 휴대전화도 검사했다. 아들은 군말 없이 잘 따랐다. 소위 ‘SKY대학’에 진학했다. 주변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A 씨를 부러워하며 “아들 잘 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아들이 A 씨를 피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새벽 늦게 들어와 아침 일찍 다시 나갔다. 외박도 잦아졌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짜증 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A 씨는 아들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A 씨 아들이 매일 혼자 학교생활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아싸(아웃사이더)’로 불린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부적응과 부모 기피 같은 현상의 배경을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공부와 삶의 균형)’ 파괴에서 찾는다. 대표적인 후유증이라는 것이다. A 씨의 상담사는 “공부시간과 사생활을 통제한 부모에게 자녀가 뒤늦게 불만을 갖고 단절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라고 했다. 한세영 이화여대 아동학과 교수는 “부모가 설계한 삶에 수년간 종속되면서 아이들의 불만이 축적된다.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위험성을 항시 지닐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모의 통제가 익숙한 아이들은 성인이 됐을 때 대인관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던 자유가 갑자기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향숙 한국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아이들의 사회성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부모들이 많다. 자폐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통제에 익숙한) 아이들은 대학 혹은 직장에서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아이를 완전히 통제하려다가 자칫 아이 인생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자기시간을 주체적으로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통제가 불가피할 경우 고압적 태도보다 아이도 납득할 수 있게 충분한 대화와 설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명순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부모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다. 아이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수년간 시간을 갖고 사회화를 지켜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내적, 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규진기자 newjin@donga.com
김자현기자 zion3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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