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길진균]개헌 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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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야구, 재즈와 함께 미국의 3대 발명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은 독립선언문을 바탕으로 1787년 인류 최초의 성문헌법을 만들었다. 미국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필요한 헌법 조항을 추가한다. 국민 기본권을 추가해 1791년 개정한 수정헌법 제1∼10조는 미국의 권리장전으로 불린다. 1992년 추가된 수정헌법 27조까지 200여 년 동안 미국 사회는 ‘원포인트 개헌’식으로 변화한 시대정신을 헌법에 반영해 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개헌론은 늘 한국 정치의 중요한 화두이자 수단이었다. 19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 각서, 1997년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연합 등이 그랬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개헌을 주장했지만 정국 운영의 동력이 떨어진 임기 후반 국면전환용 카드였다. 집권세력이 개헌을 제안하면 야당이 반대하고, 반대했던 야당이 집권 후 요구하면 야당이 된 전(前) 집권당이 반대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개헌론은 정쟁만 키우는 ‘블랙홀’이 됐다.

▷지난 대선 때 각 당 후보는 이례적으로 정권 초인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동시투표를 공약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개헌 성사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6·13 개헌의 전제조건인 국민투표법 개정 시한인 23일이 지나갔다. 지방선거 후 여야 합의로 개헌안을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권의 과거 행태를 볼 때 이번에도 개헌이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개헌안을 발의했지만 실제 개헌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보다는 약속을 지킨다는 형식에 집착한 감이 없지 않다. 헌법은 문구 하나하나가 나라의 방향을 정하는 큰 틀인데, 전문부터 다 손보겠다는 의욕이 앞섰다. 자유한국당은 자체 개헌안은 내지도 않고 반대만 했다. 지방분권 강화 등 여야가 큰 틀에서 일치하는 내용이 적잖았지만 서로에 대한 비난 속에 합의한 게 없다. 한바탕 ‘개헌 쇼’에 국민은 또 실망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필요한 개헌을 하자는 꿈은 미국에서나 꿔야 하나.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문재인 대통령#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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