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드루킹 ‘늪’ 빠진 경찰, 직진만이 살 길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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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경찰의 ‘드루킹’ 여론 조작 사건 수사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여론 조작 장소로 사용된 느릅나무 출판사를 압수수색하고 드루킹 김동원 씨 등 3명을 체포한 것은 한 달 전인 지난달 21일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내용을 보면 경찰은 적어도 그 직후에 김 씨가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과 텔레그램, 시그널 등의 스마트폰 앱으로 연락을 한 사실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찰은 13일 언론 보도로 사건 내용이 알려질 때까지 증거 확보에 필요한 강제 수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경찰이 검찰의 보강 지시를 받아 김 씨 등의 통신기록 조회 영장을 법원에 신청한 것은 김 씨를 체포한 지 26일 만인 이달 16일이다. 늑장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경찰은 여전히 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 대신 김 씨 등에게서 동의를 받아 금융거래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이주민 서울경찰청장의 태도는 수사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청장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김 씨가 김 의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김 의원이 김 씨에게 기사 인터넷접속주소(URL)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이 청장은 20일 다시 기자실을 찾아가 “정확하게 사실을 숙지하지 못했다”, “수사팀이 잘못 보고했다”며 수사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드루킹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시간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김 의원이 김 씨의 실체를 모른 채 관계를 맺었다가 협박을 당했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하지만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경찰 수뇌부는 비굴하게 정권의 눈치를 보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경찰의 드루킹 사건 수사는 2012년 말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당시 서울경찰청 수뇌부는 서울 수서경찰서가 국정원 여직원 김모 씨의 노트북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려 하자 “경찰 수사권 조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영장 신청을 유보하도록 요구했다. 그 일로 김용판 전 서울청장은 검찰 수사를 받고 기소돼 재판을 받아야 했다. 김 전 청장은 천신만고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경찰의 신뢰에는 큰 흠집이 났다.

공교롭게도 드루킹 김 씨가 체포된 지난달 말은 조국 대통령민정수석이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한창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만들던 무렵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을 ‘패싱’한 채 작성된 조정안에는 경찰의 희망대로 경찰에 수사 종결권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찰 안팎에서는 경찰 수뇌부가 검경 수사권 조정에서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수사를 미적댄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경찰에게 잘못을 만회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복기해 보자. 당시 경찰 수뇌부의 외압을 폭로했던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경찰 제복을 벗었지만 국회의원이 돼 여전히 중요한 공직을 수행하고 있다. 경찰의 축소·은폐 수사 의혹을 비롯해 댓글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 윤석열 특별수사팀장도 한동안 정권의 눈 밖에 나서 한직을 전전했지만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복권됐다.

경찰이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각종 의혹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정확하게 밝혀내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이나 특검, 그 누가 다시 수사를 맡더라도 뒤집어지지 않을 결론을 내놔야 한다. 국정원 댓글 사건 때와는 다른 결말을 기대해 본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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