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광현]지금이 정부가 목욕값도 정하던 땐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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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또 원가 공개다. 참여연대가 2011년 당시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통신사의 통신요금 원가 산정 근거자료를 공개하라는 소송을 냈는데 최근 대법원이 일부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시민단체가 원가 자체가 궁금할 리는 없고, 요금을 낮추는 압박용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공기업이 아닌 민간기업에 시민단체, 국회의원, 나아가 대통령까지 공약으로 통신비 인하 압박을 가하는 근거는 뭘까. 그 바탕에는 ‘가격=원가+적정 이윤’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소신이 깔려 있다. 논란이 됐던 치킨값, 아파트 분양가에도 적용한 논리다. 이 가격보다 높으면 해당 기업은 ‘국민들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배만 불리는 악덕업자’가 된다.

중학교만 나와도 알 수 있는 가격원리는 가격이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고 그게 모두에게 이롭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통신비 인하는 정치 논리와 시장 원리가 부딪치는 또 하나의 전선이다. 크게는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부실기업 구조조정, 규제개혁 등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굵직한 경제 이슈들과 같은 맥락이다.

전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휴대전화 요금을 정부가 인가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정부가 SK텔레콤. KT, LGU+를 공기업처럼 취급하는 주요 근거는 공공재인 주파수 이용이다. 그런데 통신회사들은 경매를 통해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수조 원을 내고 주파수를 산다. 구매한 주파수는 일정 기간 사유재산이 돼 다시 팔거나 임대하기도 한다.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한다. 기본적으로는 정부가 통신비를 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저소득층의 통신비 부담을 덜어주는 일은 정부와 정치인의 몫이다. 주파수를 팔아 생긴 돈이나 일반 세금으로 복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사정을 잘 알아서인지 아니면 하도 정치권에 시달려서인지 놀랍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통신비 인가권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법안을 제출해 놓고 있다. 실현만 된다면 대한민국 규제개혁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할인, 보편요금제, 기본료 폐지 같은 논란이 생길 근거가 원천적으로 없어진다.

그러면 소비자만 봉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 가전, 유통 등 다른 업종에서도 보듯이 적은 숫자라도 기업 간 치열한 경쟁이 있다면 함부로 가격을 올리지 못한다. 또 참여연대 출신의 김상조 위원장이 공정위에 버티고 있지 않은가. 담합 등 불법이 적발되면 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중징계를 내리면 된다.

어렸을 적 목욕탕에 가면 종종 ‘그동안 자제해오던 목욕비를 부득이 ○○○원 올리기로 했다’는 내용의 목욕업중앙회 안내문이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서민들을 위해 정부가 물가를 잡아준다고 생각했다. 짜장면값도 이발비도 다 그랬다. 심지어는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가격인 금리도 정부가 정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고, 경제 운영 원리가 완전히 바뀌었다.

시장이 만능은 아니다. 통신산업의 특성에 따른 여러 가지 규제가 필요하고 시민단체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30∼40년 전 방식으로 정부가 직접 가격을 통제하고 원가 공개를 통한 인민재판식으로 가격 압박을 하겠다면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통신 3사를 국유화하자는 게 어떨까 싶다. 결국은 소경 제 닭 잡아먹는 꼴이 되겠지만.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원가 공개#휴대전화 요금#통신비 인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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