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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公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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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公의 추락

박제균 논설실장 입력 2018-04-02 03:00수정 2018-04-0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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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공공성 상실’ 개탄했던 공직… 현 정부선 주류세력 교체 수단
정책 때문에 공무원 처벌하면 알아서 기거나 伏地不動… 정부 운영에 부메랑 될 것
박제균 논설실장
관존민비(官尊民卑). 지금은 거의 안 쓰는 말이지만 과거에는 이것이야말로 적폐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군관민(軍官民)이란 단어를 민관군(民官軍)으로 바꿨을까. 그럼에도 관존민비 의식은 아직도 엄존한다. 말로는 거부하고 몸으로는 길들여진 기형적 의식구조라고나 할까.

선진국가에서 아직도 관존민비 전통이 확실히 남아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학(私學) 스캔들이 개인 비리에서 출발했다면 일본 최고 엘리트 관료의 본산(本山)인 재무성까지 나서 14건의 공문을 조작한 것은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한국 같으면 벌써 나라가 뒤집어졌겠지만, 일본은 조용한 편이다. 한국의 촛불시위를 본떠 수백, 수천 명이 촛불을 들었으나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말 그대로 ‘촛불’ 수준이다.

혹자는 원래 일본 국민성이 조용하기 때문이란 해석을 내놓는다. 일리 있지만 뿌리 깊은 관존민비 의식도 한몫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본은 관(官)의 나라다. 메이지 유신 자체를 사무라이 출신들이 주축이 돼 일으키기도 했지만, 충성과 헌신을 중시하는 사무라이 전통은 유신 이후 일본 공직사회에 흡수됐고, 그것이 일본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다. 아베를 비롯해 과거에도 정치인과 관료들의 일탈이 있었으나 일본 공직자들은 적어도 ‘공(公)’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다고 나는 본다.

한국도 ‘관의 나라’였다. 특히 관 주도의 산업화는 세계에 모범적인 발전 모델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관이 공익보다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관의 사익 추구, 공직의 사유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박근혜 정권이었다. 그 반작용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선 공직의 공공성이 복원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직이 주류 세력을 교체하고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 돼 버린 느낌이다.

현 정부가 내치(內治)에서 가장 잘못하는 것 중 하나가 정책 때문에 공무원을 처벌하는 것이다. 그들이 개인적 이득을 추구한 것도 아니다. 전임 혹은 전전임 정권의 역점 정책을 추진하는 데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 정권이 교체되거나, 아니 승계돼도 전 정권에서 잘나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한국에서는 놀랄 일도 아니다.

그래도 이건 도가 지나치다.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이고 징계를 당하거나 심지어 수사 의뢰, 구속까지 다반사다. 물론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과도한 불법을 저질렀다면 처벌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정책 결정자도 아닌 실무자들을 위안부 합의에 참여했다고 임기 도중 소환하고, 국정 교과서 추진에 복무했다며 수사 의뢰하고, 기무사 댓글 작업에 관여했다고 구속한다.

최근에 만난 한 고위 공무원은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힘이 빠져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공무원들의 대응 방식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알아서 기거나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지난해 9월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시설공사는 6개월째 올스톱이다. 도로에 불법검문소를 설치하고 건설 자재와 장비 반입을 막는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공권력 집행을 안 하는 것이 바로 알아서 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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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는 경찰이 구속영장이 발부된 민노총 건설노조 위원장의 소재를 뻔히 알고도 영장 집행을 안 한다고 보도했다. 그런 비판에도 경찰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검찰에선 ‘과거에 함께 일했던 검사가 언제 나를 구속할지 모른다’는 자조까지 들린다.

문 대통령은 대선 때 펴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고 법에 정의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위에서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된 이유가, 그런 정의나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없어졌기 때문”이라며 공직의 공공성 상실을 개탄했다. 그렇다면 공공성을 복원하도록 공직 시스템 개혁에 힘쓸 일이다. 지금처럼 부역자 색출하듯 한다면 필연적으로 ‘영혼 없는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불러와 결국 정부 운영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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