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인권법이 죽여 버린 북한인권단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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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에서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개소식이 진행됐다.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북한 인권 조사를 정부가 독점하면서 오랫동안 관련 조사를 했던 민간단체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아일보DB
2016년 9월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에서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개소식이 진행됐다.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북한 인권 조사를 정부가 독점하면서 오랫동안 관련 조사를 했던 민간단체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2년 전 3월 북한인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1년 가까이 여야가 옥신각신 싸운 끝에 가까스로 통과되긴 했지만, 법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법은 두 가지 핵심 이행사항을 담고 있다. 하나는 통일부에 북한 인권침해 사례들을 기록하는 북한인권기록센터를 설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한인권재단을 출범시키는 것이었다. 기록센터는 법안 통과 직후 통일부 산하에 만들어졌지만, 인권재단은 아직도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여야가 재단 이사 5명씩을 추천하게 됐지만, 아직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사가 무슨 대단한 벼슬도 아닌데, 그걸 2년씩이나 방치하는 이유가 뭘까. 국회의 위선이다. 북한인권법은 선거 때 활용하는 소재였을 뿐이다. 법안이 통과돼 볼 장 다 봤으니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가 “북한인권법은 북한 인권 개선에 별 영향이 없다”고 생각해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도 북한인권법의 실효성엔 의문이 든다. 2012년 6월 ‘누구를 위한 북한인권법인가’라는 칼럼을 통해 “미국과 일본에서도 떠들썩하게 북한인권법이 통과됐지만, 상징적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실질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난 칼럼에서 북한인권법을 이왕 만들겠다면, 딴 건 몰라도 북한 인권 침해 기록 하나만은 성실히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것만 제대로 해도 북한 당국의 인권 침해에 부담을 주고 가해자들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어 결과적으로 북한 인권 개선에 큰 영향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또 통일되면 이런 기록은 대한민국이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정의의 무기가 된다.

내 판단으론 북한인권법 통과 이전에 북한 인권 조사 및 기록을 그나마 제대로 해온 곳은 북한인권정보센터(NKDB)라는 민간단체뿐이다. 나는 6년 전 칼럼에서 “북한 인권침해 사례를 최초로 기록하기 시작한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연구원들은 9년째 박봉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엄청난 자료를 축적해 놓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뒤 나는 슬픈 광경을 보게 됐다. 북한인권법 통과의 최대 수혜자가 되길 바랐던 NKDB가 오히려 최대 피해자가 된 것이다.

북한인권법으로 북한인권기록센터라는 산하 기관 하나를 더 갖게 된 통일부는 탈북자 조사를 독점하고 NKDB의 탈북자 면담 조사는 거의 막아버렸다. 15년 동안 사명감 하나로 버텼던 NKDB는 고사 위기에 내몰렸다. 현재 북한 인권 조사는 정부가 급히 공모해 뽑은 신입 조사원들이 맡고 있고,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NKDB 조사원들은 하나둘 센터를 떠나 새 일자리를 찾아 헤매게 됐다. 북한 인권 조사는 몇 년만 공백이 생겨도 나중에 메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원을 졸업하고 전국에 흩어진 탈북자들을 다시 찾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NKDB는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매년 ‘북한인권백서’를 발간해왔다. 그런데 통일부는 아직 백서조차 발급하지 않으니 얼마나 성실히 조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잘할 것이라 믿고 싶지만, 정작 눈에 보이는 건 그렇지 못한 사례들뿐이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만들어진 국정원개혁위원회는 탈북자동지회 지원금부터 잘라버렸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탈북자동지회를 만든 이후 역대 정부는 이 단체의 상징성 때문에 사무실 월세와 일부 인건비를 지원했다. 19년째 이어지던 지원은 현 정부 출범 한 달 만에 완전히 끊겼고, 탈북자동지회는 일개 민간단체로 전락해 유명무실하게 됐다. 정부는 평창 올림픽에 북한 인사들이 내려오자 태영호 전 공사 등 탈북 인사들을 ‘압박해’ 언론에 등장하지 못하게 했다. 통일부가 발간한 통일 교육 교재도 올해부터 북한 인권 관련 부분을 대폭 축소하고, ‘독재’ ‘세습’ ‘공개처형’ ‘정치범수용소’ 등의 단어와 설명이 모두 삭제됐다.

이런 정부가 북한 인권 기록만큼은 성실히 하고 있을까.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북한 인권 조사 기관이 남북대화에 나서는 통일부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다. 앞으로 북한은 북한인권기록센터를 없애라며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과거 동독도 서독 정부가 운영하는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의 폐지를 양국 관계 진전과 연계시켰다. 북한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서독은 끝내 버텼다. 하지만 통일부는 버틸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남북대화가 본격화되기 전에 미리 북한 인권 업무를 법무부에 넘기는 게 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북한 인권 조사와 기록은 반드시 정부와 민간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태만해도 민간이 커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정부는 NKDB의 하나원 접근을 전면 허용해 주길 바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북한인권법#북한 인권침해#북한인권기록센터#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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