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석호]김정은 공국(公國)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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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체제보장 포기해야 김씨일가 유지 길도 열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며칠 전 선배의 장모상에 조문을 갔다가 일군의 법학 교수들과 대화를 나눴다. 많은 주제가 오갔지만 단연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전망이 관심사였다. 대체로 낙관보단 우려가 많았는데 A 교수의 질문은 북한학 박사급이었다.

“도대체 북한이 바라는 체제 보장이라는 게 뭔가요? 미국이 안 때린다는 약속은 그렇고, 대대로 원한에 사무친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테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도 포함되는 건가요?”

이 문제를 두고 북한학계에선 북한 체제에 ‘수용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말로는 그토록 원하는 북-미 수교와 경제 지원을 북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정치·경제적 개혁과 개방이 김씨 3대 세습독재의 취약성을 증가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이 쳐들어온다. 그래서 핵·미사일을 가져야 한다. 그때까지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그간 김씨 3대 세습 독재자들의 거짓말이 탄로 난다. 미국을 따라 자유세계의 사람과 돈이 유입되고 이제 살 만해진 북한 주민들이 ‘정치도 좀 바꿔보자’고 나서면 김정은 일가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요컨대 최근 북-미 대화 정국에서의 핵심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경제위기에 처한 김정은이 어디까지 정치적 리스크를 감내할 것인지에 있다.

그래서 북한은 미래의 협상자원인 비밀 핵·미사일 시설을 최대한 숨긴 채 제재를 풀기 위한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미국은 ‘탐지능력’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김씨 3대가 북한 곳곳에 꽁꽁 숨겨놓은 핵·미사일 시설을 어떻게 다 찾겠다는 말인가? 북한은 찔끔찔끔 하나씩 공개하며 건건이 값을 매기는 ‘살라미’의 천재다.

설령 김정은이 ‘통 크게’ 모든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치자. 이젠 한국의 ‘지불능력’이 문제다. 북핵 문제 해결에 전향적이었던 민주당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뒤 경수로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한국에 떠넘겼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동맹국들을 상대로 군사비 증액과 통상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트럼프 정부가 어떻게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고공 지지율을 자랑하는 문재인 정부지만 청년 일자리와 은퇴자 노후 보장에 써야 할 재정을 밑도 끝도 안 보이는 북한 개발에 돌릴 수 있을까?

북한도 미국도 한국도 능력에 부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를 무렵 듣고 있던 B 교수가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말고, 무슨 좋은 수가 없느냐”고 인간적인 질문을 던졌다. 순간 잠재의식 속을 뱅뱅 맴돌던 한 가지 아이디어가 의식 속으로 떠올랐다.

“북한의 지금 체제를 100% 그대로 보장해 준다는 전제에서만 자유로워지면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의 작은 공국(公國) 같은 모델을 꿈꿔볼 수는 있습니다.”


김정은이 평양 도심 지역 내로 주권을 한정하고 대대로 김씨 일가에 충성해 온 로열패밀리만 데리고 산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 5개국은 평양 ‘김정은 공국’의 안보와 안전을 보장한다. 미국이 중국과 함께 그곳의 비핵화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외 지역의 핵·미사일 탐지 및 제거는 천천히 하면 된다. 한국은 자체 신용으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월가의 각종 민간 펀드를 끌어올 수 있다. 김정은 공국 유지비쯤이야 해방된 북한 지역 개발 이익으로 조달할 수 있다. 김정은이 원하는 체제 보장이 ‘김씨 왕조의 영속’이라면, 그다지 비현실적인 대안도 아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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