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정상회담 성사 막전막후

  • 신동아
  • 입력 2018년 3월 18일 0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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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복심’(윤건영) ‘김정은 문고리’(김창선)가 디딤돌 놓아
● 서기실은 ‘보이지 않는’ 北 ‘비선실세 그룹’
● 美, 한반도 주변서 핵시설 타격 아닌 전면전 연습
●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北이 느끼는 공포 상상 초월
● “손들고 나오라”는 美 압박에 北이 항복할지가 관건
● ‘기적 같은 기회’ 찾아와… “섬세하게 관리해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방남해 턱을 살짝 치키고 말이 아닌 미소로 사람 마음 사로잡기(Charm Offensive·매력공세)에 나섰을 때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김창선 북한 ‘서기실장’과 남북 정상회담의 디딤돌을 놓았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이 서울과 평창을 오가며 외부의 눈에 띄는 활동을 할 때 윤건영(청와대 국정상황실)-김창선(북한 서기실) 라인이 물밑에서 잇따라 만나 특사 교환 문제를 비롯한 구체적 협의를 했다.

김창선이 김정은 집권 이후 첫 ‘중앙당 서기실장’인지 ‘국방위원회(현 국무위원회) 서기실장’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 언론은 김창선에 대해 ‘서기실장’ ‘전 국방위원회 서기실장’ ‘김정은의 첫 비서실장’ 등으로 엇갈려 보도했다.

북한은 방남 인원을 통보하면서 ‘서기실장 김창선’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여정이 서기실장을 맡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관측도 있다.

전직 안보 당국 고위 인사는 “김창선이 서기실 최고위 간부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서기실이 남북 협상에 직접 나선 건 전례 없는 일이다. 비핵화로 가는 통 큰 결심이든, 시간 벌기용 평화 공세이든 평양이 전략적 역량을 집중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3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정원장, 윤건영 국정상황실장 등으로 이뤄진 특사단을 평양의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만났다. 북한 집권자가 남측 관료를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방북한 특사단은 주로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과 면담했다.

“北, ‘군사 옵션' 심각하게 받아들여”

김정은이 특사단과 면담·만찬을 한 3층 높이 노동당 청사에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다. 평양 사람들은 이곳을 ‘당중앙위원회’라고 일컫는다. 이 건물에 입주한 기관이 서기실이다. 김정은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다. 3층 건물을 업무 장소로 쓰기에 간부들 사이에선 ‘3층 서기실’로 불린다.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에서는 절대 권력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권한 또한 강하게 마련이다. 태영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은 서기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기실의 존재를 아는 북한 사람이 거의 없다. 간부 중에서도 고위층만 안다. 수령을 신(神)처럼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 수령이지 한 개인 아닌가.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도록 보좌하는 게 서기실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서기실 고위 인사들은 노동신문 같은 곳에 이름이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다. 면면이나 직위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것이다. 서기실은 서기실장-부부장-과장 체계로 이뤄졌으며 직급 자체가 비밀이다. 조직지도부 부부장들 위에 서기실이 있다고 보면 된다. 노동신문에 이름이 나오는 간부들 있지 않나. 최룡해(노동당 비서), 박봉주(내각 총리) 등이 다 없어져도 북한 체제는 아무 일 없이 흘러간다. 보이지 않는 라인만 살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서기실은 ‘평양의 비선실세 그룹’이면서 ‘김정은을 둘러싼 문고리 권력’인 것이다. 노동당 간부로 일하다 한국에 입국한 한 망명 인사는 ‘서기실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면 김정은이 직접 온 것과 같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3층 서기실에서 사람이 나오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직지도부 부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맞는다. 서기실 인사가 ‘특정 문제가 제기돼 요해하러 왔다’고 하면 당중앙위원회 부장, 부부장들이 답을 내놓아야 한다. 김정은이 ‘서기실에서 요해한 대로 하시오’ 하면 그걸로 끝이다.”

청와대 내 청와대-北 중앙당 서기실 연결돼

또 다른 인사는 “중앙당 서기실의 권한은 한국의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김정은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정책 결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정보 당국 고위직을 지낸 인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정일 시대 수령의 통치를 뒷받침하면서 역할을 확대한 서기실 시스템이 지금껏 유지된다. 김정일 사후 서기실 중심 지도체제가 형성됐다. 이 체제가 노동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통치를 구현하는 게 북한의 현재 권력 구조다.”

‘서기실장 김창선’의 카운터파트인 윤건영 국정상황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린다. 문 대통령은 19대 국회의원 때 “윤 특보와 상의해보세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윤 특보가 윤 실장이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후보와 관련된 대부분의 정무 사안을 조율했고 문 대통령은 윤 실장에게 무한신뢰를 보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노무현재단, 문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까지 늘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남북관계와 관련한 문 대통령의 의중을 꿰뚫고 있는 데다 선량한 얼굴의 포커페이스로 입도 무겁기로 소문났다. 북한과 은밀한 대화를 할 책임자로 제격인 것이다.

일부에서는 방북 특사단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빠지고 윤건영 실장이 들어간 배경을 두고 의아해하기도 했으나 국정상황실이 남북관계를 챙기고 있는 데다 앞서 언급했듯 한반도에 불어온 봄기운의 시작도 김여정 방남 시 국정상황실-서기실 채널에서 비롯한 것이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통로이던 통일부-통일전선부 채널(통-통 라인) 대신 국정상황실과 서기실이 ‘김정은의 최측근’(김창선)과 ‘문재인의 복심’(윤건영)을 통해 직접 연결됐다. 국정상황실은 ‘청와대 내 청와대’로 불리며 국정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왔다.

대북 특사단이 3월 5일부터 1박 2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 3월 6일 발표한 언론 발표문에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완화와 긴밀한 협의를 위해 정상 간 핫라인(Hot Line)을 설치하기로 했으며,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첫 통화를 실시키로 했다”고 돼 있다. 남북 정상 간 핫라인도 국정상황실-서기실이 관장하게 될 소지가 크다. 국정상황실-서기실 채널이 수시로 소통하면서 현안을 조율할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北, 문재인 정부에 신뢰감 가진 듯”

전직 안보 당국 고위 인사는 “서기실이 직접 나섰다면 북한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종의 결심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면서 “평창올림픽 기간에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미루기로 하는 등의 조처를 보고 북한이 문재인 정부에 신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여정 제1부부장, 김창선 ‘서기실장’과 함께 방남한 맹경일 북한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19일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윤건영-김창선 라인의 협의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연락책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맹경일 부부장은 대남 사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김양건-원동연-맹경일로 이어지는 통일전선부 라인의 막내 격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쌓은 한국 내 인맥도 두텁다.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핵심 설계자 중 한 인사는 2012년 대선 직후 박근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대북정책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문재인 후보)가 당선됐다면 벌써부터 북한에 특사를 보냈을 것이다. 맹경일이 이런 애들은 지금도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맹 부부장은 젊은 시절이던 2000년대 초 남측 혹은 해외동포 인사가 평양을 찾을 때 공항에서부터 ‘가방모찌’ 노릇을 했다.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은 평창올림픽 폐막식 때 한국을 찾아 서훈 국정원장 등과 접촉했으며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사단 방북이 이뤄져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로 이어졌다. 정의용 실장과 서훈 원장은 3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다. 외관상 한국이 북한을 끌어내고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중재 외교가 성공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 트럼프가 비핵화에 합의하고 한반도 정세에 대격변이 일어난다면 1등 공신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정원장, 윤건영 국정상황실장이다.

서훈 국정원장은 2000년,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최전선에서 활약한 남북협상 산증인이다.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들어가 북한통으로 잔뼈가 굵었다.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은 서훈 대북전략조정단장-서영교 대북전략국장-김보현 3차장의 작품이다. 서 원장은 2006년 11월부터 노무현 정부 임기 만료 시까지 3차장(북한 담당)으로 일하면서 남북 간 공식·비공식 대화를 조율했으며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4월 문재인-김정은 회담으로 3차례의 정상회담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한동안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외교·안보 부처 인사들과 서 원장이 회의를 함께 했다.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한 인사는 “서훈 원장이 안정감이 있었다. 균형이 잡혔더라”라고 촌평했다.

“신년사 이전까진 의미 있는 접촉 전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외교부에서는 경제통상통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힘을 보탰다. “한미 FTA가 참 좋은 건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고 노무현 대통령이 묻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던 그는 “대통령께서 설명을 제일로 잘하신다, 지금까지 잘하셨다”고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외교사절과 외신을 접촉해 “노무현 정부가 좌편향적이 아니며 중도 노선”이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작업을 도맡았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는 문재인 후보의 메시지를 미국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해 7월만 해도 국무회의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며 한계를 토로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을 움직인 것을 두고, 2017년 9월 유엔 총회에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에 어떠한 적대행위도 중단한다는 내용을 담은 ‘평창올림픽 휴전 결의’를 제출한 게 절묘했다는 평가가 있다. 미국이 거부할 수 없는 ‘평창올림픽 휴전 결의’를 제안함으로써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외에서 따로 비밀 접촉은 없었다. 베를린 선언부터 시작한다면 우리가 제안한 셈이고 또 신년사를 생각하자면 북한 측에서도 호응을 했다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신년사 발표 이후 주로 판문점에서 대북 접촉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의 대남 라인 인사들과 오랫동안 수시로 접촉해온 대북소식통은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이전까지 남북 간의 의미 있는 접촉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운전석에 앉아 ‘중재 외교’를 통해 뒷좌석에 북한과 미국을 앉힌 것으로 보이나 시각을 바꿔보면 김정은이 주도해 사안이 전개된 측면도 있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와 평창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국면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춘 데는 트럼프의 ‘최대 압박’과 ‘군사적 위협’이 큰 영향을 미쳤다.

주일 미군기지 장비·병력으로 가득 차

지난해 12월 6일 경기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기지에서 F-16 전투기들이 분주하게 이동하고 있다. 한미 양국 공군은 12월 4~8일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에이스’를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12월 6일 경기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기지에서 F-16 전투기들이 분주하게 이동하고 있다. 한미 양국 공군은 12월 4~8일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에이스’를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11월, 12월 북한 인근 해역에서 실시한 한미 군사훈련 때 북한이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는 분석이 많다. 한반도 주변을 누빈 11월의 항공모함들과 12월의 전투기들이 김정은의 생각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12월 4~8일 미군 태평양사령부가 한국 공군과 함께 실시한 ‘비질런트 에이스’는 전면전 연습이나 다름없었다. 전략폭격기 B-1B, 스텔스기 F-22, F-35 등 230여 대의 한미 공군기가 참여했다. 전투기가 하루 6회까지 출격이 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북한 내 타격 목표를 하루 1400회 공격하는 규모였다. 주일 미군기지에는 병력, 장비가 더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전력 증강이 이뤄져 있다. 현재 한반도 주변에 배치된 미군 전력은 핵시설만 타격하는 군사작전용으로는 과한 수준이다.

미국 정보기관과 오랫동안 일해온 한국계 인사는 “워싱턴이 언론을 이용해 군사 옵션을 연거푸 흘린 것은 북한을 실제로 타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김정은을 벼랑 끝까지 내몬 후 손을 들고 나오면 대화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트럼프는 엄청난 돈이 드는 전쟁을 할 스타일이 아니다. 김정은이 느끼는 공포와 한국의 중재 외교가 결합돼 트럼프가 바라던 시점보다 이르게 테이블이 마련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된 5월은 키리졸브와 독수리 연습이 마무리되는 시기로 한반도에 미군의 막강한 전략 자산이 전개된다. 6·25전쟁과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군 3사단 제1기갑여단전투팀도 2월 20일부터 순환 배치 형식으로 한반도에 전개됐다.

탈북 노동당 간부들에 따르면 평양이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대규모로 진행될 때 느끼는 공포감은 한국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한다. 북한군도 한미 군사훈련에 맞서 대응 기동을 해야 하는데 올해 같은 경우는 중국이 시늉만 제재에서 실제 제재로 태도를 바꾸면서 유류 확보 등 비용 문제에서도 어려움이 있다.

美, 정상회담 직전까지 北 압박

미국은 5월 북·미 정상회담 직전까지 군사적 위협을 포함한 제재를 북한에 강력하게 가함으로써 ‘손을 들고 나오라’는 메시지를 김정은에게 전할 것이다. 한미 간 신뢰를 바탕으로 4월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하는 까닭이다.

김정은이 비핵화-북·미수교를 통해 정상국가로 가는 ‘통 큰 결심’을 한 것인지, 미국의 선제 타격을 막고 핵무장 완성까지 시간 벌기에 나선 것인지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은 달라진다. 성과 지향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북한과 합의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한반도의 봄’을 만들어낼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으나 민감하고 섬세하게 다루지 않으면 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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