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걸쳐 240개국 여행… “투발루야 잘 있느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토요기획]‘가장 많은 나라 가본 한국인’ 이해욱 전 체신부 차관

이해욱 전 차관이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돋보기로 지구본을 보면서 지난 40여 년 동안 여행했던 각국을 살펴보며 성취감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해욱 전 차관이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돋보기로 지구본을 보면서 지난 40여 년 동안 여행했던 각국을 살펴보며 성취감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45년간 세계 240개 국가와 자치령 등을 여행하고 최근 한국기록원의 공인 인증까지 받은 이해욱 전 체신부 차관(80). 납치 위험, 내란과 시위 사태 등도 그의 도전을 막지는 못했는데…. 세계 여행에서 그는 무얼 얻었을까.》


“나를 세계 여행으로 이끈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었습니다. 물론 오랜 시간에 걸친 대장정을 지속하고 끝을 낼 수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아내죠. 아내가 저를 지지하고 상당수 국가는 동행해 줬기에 가능했습니다. 혼자서는 외롭기도 하고 위험해서도 못합니다.”

2016년 한국인 최초로 240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세운 이해욱 전 체신부 차관. 그가 최근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섬나라 100개국 방문을 포함한 240개국 방문’ 공식 인증서를 받았다. 1938년생으로 올해 80세인 그에게 섬나라 100개국을 포함한 240개국 방문 도전은 무슨 의미일까. 무엇을 얻었을까. 서울 강남역 부근 20여 m²의 작은 사무실을 찾아 여행담을 들었다. 사무실은 각국 여행 자료와 사진, 중국에서 구입한 지구본 등으로 꽉 차 있었다.

―세계에 240개국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닌 것인가.

“유엔 가입국은 193개국이다. 이 중 탈레반과 전쟁 등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은 끝내 가지 못했다. 나머지 48개국 중에는 유엔에 가입하지 않은 팔레스타인도 있고 자치령이나 통상적인 국가는 아니지만 세계표준화기구(ISO)가 ‘국가 코드’를 부여하고 있는 곳도 있다.”

그는 “북한은 2006년 8월 3박 4일간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게 전부”라며 “평양을 가야 제대로 북한을 갔다고 할 수 있는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240개국’이나 다녔으니 10대 때부터 배낭여행도 다니고 한 줄 알았는데 33세 때 처음 해외에 나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체신부 사무관이던 1971년 5월, 간신히 출장팀에 끼어 나간 것이 첫 해외여행이다. 요즘 같은 배낭여행은 생각지도 못할 때다. 체신부 차관으로 공직을 마치고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등도 다 퇴직한 후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서 240개국을 마치는 데는 2016년까지 45년이 걸렸다.”

―해외여행에 대한 동경이나 꿈은 언제부터였는지….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취미가 영화 감상이었다. 1950년대 서울 ‘신촌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을 보며 이국적 풍경에 매료돼 일찍부터 유학을 꿈꿨다. 고2 때 주한미군이 가르치는 영어학원에도 다녔다. 대학도 외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해외로 유학하지 못하게 제도가 바뀌어 꿈을 접었다.”

―2016년에 ‘240개국 여행’을 마쳤는데 인증을 받는 데 2년이나 걸렸다.


“출입국 도장이 찍힌 여권을 복사해 각 도장이 어느 나라, 어느 지역 것인지 하나하나 설명을 붙이고, 한 나라당 10장가량의 사진을 첨부하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어 힘들었다. 여행하면서 쓴 일기장도 보내라고 했지만 겉장만 보냈다. 세계 기네스북 기록에도 신청을 하라는 사람이 있는데 싫다고 했다. 너무 번거롭고 비용도 적지 않은 데다 인증 기준도 뚜렷하지 않았다. 무슨 인증을 받으려고 다닌 것은 아니니까.”

―언제 어떤 계기로 전 세계를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전기통신공사 사장을 퇴직하고 한 달 남짓 지난 1993년 5월, 처음으로 북유럽 단체 여행을 가게 됐다. 중간에 우리 부부만 이탈해 스위스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을 돌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도전 의식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 후 약 2년간 유로 패스로 유럽 전역을 돌면서 다른 지역도 공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역 시절 이 전 차관은 은퇴하면 산부인과 의사이던 아내(김성심 씨)도 진료를 중단하고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고생스럽더라도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 일주 여행이 되리라고는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5대양 6대주를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물론이다. 나름대로 치밀한 작전이 있었다. 먼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먼 곳부터 다니자고 해서 중남미부터 시작했다. 한 대륙이나 지역을 잡으면 몇 개 블록으로 나눠 빠지는 나라가 없도록 동선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중남미는 40여 일 단체 여행을 다녀온 뒤 빠진 나라를 리스트업해 아내와 배낭여행을 3차례 더 다녔다. 1997년 1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을 도는 데 약 5년이 걸렸다. 남극 대륙과 남극 주변의 사우스조지아, 포클랜드 등은 남미와는 별도로 다녀왔다. 그 후에는 태평양의 섬나라, 중동과 아프리카 순이었다. 아시아 각국은 틈나는 대로 단체나 개별 여행을 다녔다.”

―가장 힘들었던 곳을 꼽으라면….

아프리카 가나의 노천시장에서 박을 파는 여인.
아프리카 가나의 노천시장에서 박을 파는 여인.
“단연 아프리카 서부 지역 국가들이다. 아프리카 53개국 중 이곳은 교통편도 불편하고 내전에 풍토병도 걱정됐고 무엇보다 여행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 이곳으로 가는 단체 여행이 간혹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서부 아프리카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단체 여행팀에 끼어서 다녔다.”

그가 서부 아프리카 국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2010년 3월 7일 유엔 가입국 192개국 여행이 마무리됐다. 그해 10월 19일 한국기록원으로부터 공인인증서도 받았다고 했다. 그때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ISO가 국가라고 인증한 자치령이나 섬나라 등도 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두 나라만 다녀도 사연이 많은데….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는 섬나라 남태평양의 투발루.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는 섬나라 남태평양의 투발루.
“아제르바이잔은 기차에 탑승할 때 현금을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가이드가 부주의로 얘기를 하지 않아 중간에 역에서 하차당해 수색을 받고 조사를 받았다. 가이드가 돈을 좀 집어주고 나서야 간신히 해결됐다. 아프리카 알제리에서는 도착하기 직전 독일 여성 한 명이 여행 중 강도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 기간 경찰 호위를 받으며 VIP 대접을 받기도 했다. 남태평양의 통가는 비자가 필요 없다고 해서 비자 없이 갔더니 입국 심사장에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피지로 비행기 타고 나와서 비자를 받아 다시 들어갔다.”

이 전 차관은 2008년 1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는 공항에서 납치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말이 국제공항이지 베냉과 접경지역에 있는 공항 청사 마당에 화물 트럭이 어지럽게 세워진 곳을 지나서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그런데 화물 트럭 중간에 숨어있던 몇 명의 괴한이 다가와 “여권을 보자”며 시비를 걸어왔다는 것. 그는 멀리 공항 청사에 있는 일행에게 수건을 흔들고 소리치며 SOS를 요청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지부티와 수단 등을 여행하고 돌아오다 봉와직염(급성 세균감염증의 일종)에 걸려 응급실 신세를 진 얘기, 2010년 7월 인도 북부 카슈미르를 여행할 때 반정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져 낭패를 봤던 얘기 등 끝이 없었다.

이 전 차관은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기록을 하고 사진 수만 장과 함께 동영상도 250시간 분량을 촬영했다고 한다.

남극의 다양한 종류의 펭귄 무리. 이해욱 전 차관 제공
남극의 다양한 종류의 펭귄 무리. 이해욱 전 차관 제공
그는 인상 깊었던 여행지가 많겠지만 몇 곳만 꼽아 달라는 물음에 수만 마리의 펭귄이 가득했던 남극 대륙과 함께 바다에 잠기고 있는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를 들었다. 9개의 산호섬으로 구성된 투발루는 평균 해발고도가 3m 정도로 이미 2개는 바다에 잠겼다. 극지방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해수면이 1961년부터 해마다 약 1.8mm씩 높아지고 점차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약 40년 후 완전히 잠길 것으로 예상되는 투발루 섬 곳곳에 이미 물에 잠긴 곳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주민들은 순차적으로 뉴질랜드로 이주 중이다. 그는 2005년 피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투발루로 가던 중 비행기 고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는데 3년 후에 다시 갔다. 그곳을 가지 않으면 태평양의 섬을 다녔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240개국을 다니는 데 비용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배낭여행이라고 하지만 기차에서 자고 노숙하고 하는 여행은 아니었다. 숙소는 비싸지 않으면서도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의외의 사건 사고가 나면 일정에 큰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이 전 차관은 “자식 3명 중 누구도 해외 유학을 가지 않아 교육 비용이 크게 안 들었다. 평소 골프도 안 하고 자동차도 안 굴리며 여행 경비를 틈틈이 모았다”고 했다.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240개국을 다녀온 뒤로는 국내 여행은 다녔지만 해외엔 나가지 않았다. 앞으로는 일본 중국 등 가까운 곳이나 다니려 한다.”

그는 3시간 이상에 걸친 인터뷰를 마칠 때쯤 “지난해 해외로 나간 한국인이 2649만 명에 이른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나보다 많은 국가를 가본 사람은 없을 거야’라고 혼자 생각하면 괜히 뿌듯하고 1등을 한 기분”이라고 했다.

그렇게 힘들게 많은 곳을 다녀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여행을 할수록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인다. 무엇보다 새롭게 꿈꾸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점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답했다.

이 전 차관은 ‘세계는 한 권의 책’(2011년), ‘이해욱 할아버지의 지구별 여행기’(2013년)라는 책도 펴냈다.

▼5박 6일 뱃멀미 고통… 나폴레옹 혼 깃든 외로운 섬▼

마지막 퍼즐 ‘240번째 국가’는 영국 자치령 세인트헬레나섬

이해욱 전 차관이 ‘240번째 국가’로 간 곳은 프랑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영국군에 의해 유배돼 숨진 대서양의 고도이자 영국 자치령인 세인트헬레나다.

2016년 이 전 차관 부부는 오랫동안 마지막 방문지로 남겨둔 이곳 한 곳을 다녀오는 데 20여 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전 차관과 부인 김성심 씨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인천공항에서 찍은 사진에는 활짝 웃고 있지만 사실은 녹초가 된 뒤였다. 세인트헬레나섬은 우편운송선 ‘RMS 세인트 헬레나호’를 타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편도로만 5박 6일이 걸리는 곳이었다. 그는 “승객 130여 명이 타는 배였는데 흔들림이 심해 미리 준비해 간 멀미약은 물론이고 배에서 돈을 받고 놔주는 주사도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섬에 도착한 뒤 일주일가량 구경하면서도 돌아가는 배를 탈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이 전 차관은 “푸른 바다와 작은 산으로 이뤄진 섬은 나폴레옹에게는 유배지였으나 그야말로 천혜의 관광지였다”고 말했다. 면적 121km²로 주도 제임스타운 등에 약 4530명(2016년 기준·위키피디아)이 사는 곳이다. 나폴레옹 시신은 파리로 옮겨졌고 지금은 빈터에 무덤이 있었다는 표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섬의 한 식당에 실물 크기의 큰 나폴레옹 조형물(사진)이 세워져 있는 등 나폴레옹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고 이 전 차관은 말했다. 그는 “그곳은 여행 대상 섬들 중에서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자 배 운항 일정도 불규칙했지만 반드시 도전해야 했던 곳”이라며 세인트헬레나섬을 마지막 여행지로 꼽은 이유를 설명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이해욱#이해욱차관#세계여행#세인트헬레나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