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조수진]첨단 독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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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위험한 곳이다. 1978년 영국에 망명해 BBC 해설가로 활동하던 소련인 게오르기 마르코프가 런던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행인의 우산 끝에 찔렸는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독극물 리신에 중독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연방보안국(FSB) 전직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런던의 한 호텔에서 옛 동료와 녹차를 마신 뒤 시름시름 앓다가 3주 뒤 사망했다. 사용된 독극물은 청산가리보다 독성이 25만 배 강한 방사성물질 폴로늄 210이었다.

▷4일 영국 솔즈베리의 한 쇼핑몰 벤치에서 러시아 군정보부 출신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 딸이 독성물질에 노출돼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사용된 물질은 소련이 군사용으로 개발한 신경작용제 노비초크로 확인됐다. 노비초크는 지난해 북한이 김정남을 살해할 때 사용한 신경작용제 VX보다 8배나 독성이 강하다. 영국 검찰은 반(反)푸틴 활동을 하다가 자국에서 석연치 않게 숨진 러시아인 14명의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했다.

▷첨단 독살에는 대개 러시아의 기술이 개입돼 있다. 2004년 영화배우 같은 외모를 지닌 우크라이나의 야당 대선 후보인 유셴코가 흉측한 얼굴이 돼 선거 며칠 전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국장과 함께 식사를 한 직후 복통과 함께 얼굴 피부가 상하기 시작했다. 다이옥신 중 독성이 가장 강한 TCDD에 중독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유셴코는 여당의 러시아계 후보와 대결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은 FSB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야만성과 첨단 독성 물질의 결합이 빚어낸 무시무시한 장면들이다.

▷영국과 러시아의 적대 관계는 19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식민지 덕분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만으로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했고 영국은 그것을 막으려 했다. 그 적대관계는 영국 영화 007 시리즈에서 늘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잇단 독살 사건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오랜 적대관계가 재연될 조짐이다.
 
조수진 논설위원 jin0629@donga.com
#게오르기 마르코프#세르게이 스크리팔#첨단 독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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