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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부형권]토크쇼보다 ‘듣기 쇼’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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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부형권]토크쇼보다 ‘듣기 쇼’가 필요하다

부형권 국제부장 입력 2018-02-24 03:00수정 2018-02-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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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국제부장
“아빠는 지방 출장을 갈 때마다 고속도로휴게소에서 호두과자로 식사를 때우곤 했어.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네 학원비를 대는 건데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겠니?”

“…. 아빠? 그 맛있는 호두과자를 아빠만 드신 거예요?”

중학생 아들을 둔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털어놓은 이야기. 기자 또래 동료 친구들이 처절히 공감했다. 한 지인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아빠는 열심히 일해서 서울에 집 한 채 장만했다. 네 공부와 네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집을 팔고 길에 나앉을 각오까지 돼 있다.” 그의 고교생 자녀가 며칠 후 진지하게 말했다. “아빠 저는 공부 쪽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약속하신 대로’ 이 집은 저한테 물려주시는 거죠?”

부모는 해주고 싶은 말을 하는데 아이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외국인 외계인과 대화해도 이보다 나을 것”이란 학부모가 주위에 많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10일 청와대에서 비밀회동을 할 예정이었다가 북한 측의 막판 취소로 불발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 역사적 회동이 성사됐어도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부모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아이의 허무한 대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펜스 부통령이 북한 면전에 강력한 비핵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강조한다. 그런 살벌한 미국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할 북한이 아니다. 마주 보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상황을 대화라 할 수 없다. 말로 하는 싸움일 뿐이다. 미국이든 북한이든, 어느 한쪽만이라도 “상대 얘기를 직접 듣고 싶다”는 마음가짐일 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그런 분위기 만들기가 한국 정부의 힘든 숙제다.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일은 정신적 심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쉽지 않다. 한(恨) 많은 어르신을 인터뷰하면서 그 말씀을 5시간 반 동안 들어드린 경험이 있다. 너무 간절하고 절박해서 눈길 한번 흩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막판엔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데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는 간혹 전화해서 한두 시간씩 하소연하곤 했다. 기자는 그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상황도 안 된다. 그런데도 그는 전화를 끊으면서 늘 이렇게 말한다. “얘기하다 보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많이 정리되네요. 기자 선생, 들어줘서 고마워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1일 총기 참사를 겪은 학생과 부모 40여 명을 백악관에 초청해 70분 정도 공개 면담했다. 어디서나 독설과 직설을 퍼붓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참석자 발언이 끝낼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경청하는 모습이 낯설고,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메모지 맨 밑엔 ‘나는 당신의 말을 듣는다(I hear you)’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일부 언론은 “얼마나 공감 능력이 없으면 그런 내용까지 적어 놓느냐”고 한다. TV 리얼리티쇼를 오래 진행한 그이기에 ‘경청도 하나의 쇼였을 것’이란 시선마저 있다. 기자는 그 메모가 ‘이 자리가 듣는 자리임을 잊지 말자’는 자기 다짐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듣기의 어려움을 체험해봤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든, 김정은의 북한이든 상대 얘기를 70분 정도만 경청해주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내 입장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자리가 아니고, 상대 얘기를 들어주는 만남이 북-미 간에도 가능할까. 말만 하는 토크쇼가 아니라 그런 ‘듣기 쇼’가 열릴 수만 있다면 복잡한 북핵 문제가 스스로 정리의 방향이나 단초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마이크 펜스#김여정#도널드 트럼프#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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