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치영]채용비리 청탁자는 왜 감추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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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장
신치영 경제부장
아침 출근길마다 좌회전 신호를 1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습정체 사거리가 있다. 좌회전하려는 차들은 많은데 신호는 너무 짧다. 운전자들은 긴 차량 행렬 속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갑자기 값비싼 차 한 대가 비어 있는 옆 차로를 내달리더니 신호등 직전에서 막무가내로 끼어든다. 이를 지켜보던 교통경찰은 못 본 척 딴청을 부린다. 얌체 차량이 좌회전하고 나서 빨간불로 바뀌는 신호등을 보고 기다리던 운전자들은 화가 치민다. 알고 보니 이 차 뒷좌석에는 교통경찰도 어찌하기 힘든 ‘힘 있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요즘 정부와 검찰이 채용비리 사건을 다루는 걸 보면서 이런 상황이 떠올랐다. 은행권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된 부정 채용은 내부 조직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긴 사례보다 외부 청탁을 받아 저지른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청와대나 금융당국, 검찰(위 사례에서 교통경찰)은 외부 청탁자들(얌체 차량 승차자)을 철저하게 베일 속에 가리고 있다.

나는 검찰의 우리은행 채용비리 수사,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대한 정부 합동조사, 금융감독원의 은행권 검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누가 청탁을 했는지에 큰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수사 또는 조사 주체 누구도 청탁자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검찰의 우리은행 채용비리 사건 수사를 보자. 이달 초 서울북부지검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 행장 등 은행 관계자 6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작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국가정보원 관계자, 금감원 간부, 대학교 부총장, 기업체 전무 등이 청탁을 했다는 자료를 공개했지만 청탁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다. “의사 결정권자와 핵심 실무자들을 가려서 기소함으로써 ‘환부만 도려내는’ 수사를 구현했다”는 검찰의 발표는 청탁자를 가려내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자기 고백인지, 사건의 파장을 억제했다는 자랑인지 아리송했다.

KB국민은행 등 5개 은행의 채용비리 조사 결과를 발표한 이후 금감원 안팎에서도 비리를 저지른 일부 은행 관계자에 대한 얘기만 흘러나올 뿐 청탁자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되지 않고 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조사 결과를 발표한 기획재정부도 마찬가지다.

사실 주인이 없는 은행의 행장과 임원들에게는 눈치를 봐야 할 ‘슈퍼갑’이 두 손으로 셀 수 없이 많다. 지주회장이나 행장을 언제라도 끌어내릴 수 있는 청와대와 금융당국은 물론이고 정부 부처와 권력기관, 국회의원들…. 그리고 은행에 수백억 원의 예금을 맡기는 지방자치단체와 대기업, 고액 자산가들까지 챙겨야 한다. 인사 때만 되면 사방에서 민원이 밀려든다.

그리고 어느 은행의 최고경영자든 털어서 먼지 안 날 만큼 완벽하게 조직을 관리할 수 있는 ‘신공’을 갖추지 않은 이상 유사시에 대비해 ‘보험에 드는’ 심정으로 청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결국 채용비리는 힘 있는 사람들의 청탁을 막지 못하면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이다.

공무원이 지위를 이용해 부정 채용 압력을 넣거나 민간인이 대가를 주고 채용 청탁을 하는 행위 모두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범죄 행위다.

채용비리의 더욱 큰 문제는 청년들이 오랜 시간 젊음을 포기하며 쌓아온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불공정 행위라는 점이다. 채용비리를 막기 위해서는 청탁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부부처, 금융당국, 검찰은 아직까지 청탁자 처벌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만약 대통령이 “청년 세대의 좌절을 막기 위해서라도 채용 청탁을 하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일벌백계하겠다”고 천명한다면 나는 청년들과 함께 대통령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이다.

신치영 경제부장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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