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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정동]왜 한국엔 재미있는 산업기술 책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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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정동]왜 한국엔 재미있는 산업기술 책이 없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입력 2018-02-15 03:00수정 2018-02-15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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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나온 유익한 책 ‘신칸센’… 한국 고속철 기술자에게도 도움
어려운 과학도 대중서적 있는데 ‘기술’ 지식콘텐츠는 아예 없다
지식격차 축소-융합·혁신 위해 산업기술 핵심 원리 시리즈, 최소한 1000권 출판 프로젝트를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한 원로기술자가 1980년대 초 고속철도 사업에 참여하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일본에서 출판된 ‘신칸센’이라는 제목의 책이 참 재미있고 유익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서부터 생각의 실타래가 풀렸다. 일본의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산업기술을 소개하는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놀랄 정도로 수두룩했다.

한 출판사는 250권이 넘는 시리즈를 냈다. 그런 출판사가 한두 군데도 아니다. 압연, 모터, 센서처럼 전통적인 기술이 제목인 것부터 3차원(3D) 제조나 인공지능(AI) 같은 첨단 주제도 있었다. 학부를 졸업한 정도의 상식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게 공학적 원리를 설명했다. 특히 핵심을 요약한 정교한 삽화들이 직관적 이해를 도왔다.

가령 교량설계 기술자가 최근 유행하는 딥러닝이 어떤 원리인지 핵심을 알고 싶을 때 책 한 권을 읽으면 감을 잡기에 충분하다. 한 걸음 나아가 만약 딥러닝을 교량설계에 이용하겠다면 그 분야의 전문가와 본격적으로 협력하면 된다. ‘신칸센’ 책을 재미있게 보았던 한국의 기술자들도 비록 고속철도 자체를 접한 적은 없지만 공학 지식과 경험은 있었기에 그 책을 보는 순간 ‘아하’ 하면서 핵심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산업기술의 핵심을 요약한 책 시리즈는 사실 일본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전통의 기술선진국이 원조다. 멀리 보면 1700년대 중반 프랑스의 디드로가 편집한 백과전서도 좋은 예다. 면화에서 실을 뽑는 조면기 같은 당대 산업기술의 핵심 원리가 꼼꼼히 집약돼 있다. 정교한 삽화만 3000장이 넘는다.

한 줄 공식으로 깔끔히 정리되는 과학적 원리와 달리 산업기술은 시행착오가 쌓여 만들어진다. 축적된 결과물을 기록하지 않으면 복원도, 다음 단계의 혁신도 불가능하다. 열역학의 원리는 후진국에서도 알 수 있지만 자동차 엔진은 아무 나라나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행착오가 많이 축적된 산업 선진국일수록 예외 없이 산업기술 개요 책자 시리즈가 잘 발달돼 있다.

며칠 전 서점에서 과학과 경영, 경제 대중서가 있는 서가를 지나면서 갑자기 깨달았다. 과학과 경영, 경제도 있는데 정작 우리를 먹여 살리는 ‘기술’에 대한 지식콘텐츠 분야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을. 쉽게 말해 해양플랜트 산업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해양플랜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핵심을 볼 수 있는 책은 없다. 우리 산업계도 신칸센만큼이나 놀라운 기술이 적지 않다. 요약해서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 분야 사람들 외에는 접할 방법이 없다.

200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한 국가의 ‘지식수준’이 아니라 국가 내 ‘지식격차’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후진국에서도 나노기술을 연구하지만 대부분은 나노가 무엇인지 모른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나노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나노가 무엇인지 최소한의 내용은 안다. 이처럼 지식의 격차가 작으면 융합이 잘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혁신적 조합이 파생될 확률이 높아진다. 선진국이 근대 이후 치열하게 백과전서를 펴내고, 산업기술에 대한 대중적 지식콘텐츠를 확산시켜온 것은 바로 사회 전반의 지식격차를 줄이면 융합과 혁신이 촉진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특히 산업기술의 지식격차를 메우기 위한 지식의 카테고리를 만들 때가 됐다. 최소 1000권을 목표로 산업기술 각 분야의 당대 지식과 경험을 핵심적으로 요약한 시리즈를 만들어야 한다.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 세대 기술자들이 저자로 나서면 인생 이모작 프로젝트가 된다. 축적된 경험이 사장되지 않고, 다른 분야로 활용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출판계는 이 새로운 장르의 시리즈에 더해 어린이용 만화책이나 청소년 진로지도용 책 같은 출판물을 연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육계도 이 콘텐츠를 플랫폼 삼아 우리 사회의 기술지능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송이나 언론도 다큐멘터리나 연재기획 기사 등 이차적인 콘텐츠를 계속 파생시켜야 한다.

사회적 파급 효과가 큰 이런 국가적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기도 하다. 기술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핵심 지식 인프라이자 한국 사회의 지식지평을 한 단계 성숙시킬 새로운 장르로서 ‘산업기술 핵심 원리 시리즈 출판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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