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기정]주인 없는 산업은행, 주인 있는 호반건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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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산업2부 차장
고기정 산업2부 차장
지난주 대우건설 매각이 무산된 건 해외 부실이 드러난 때문이다. 대우건설을 팔려던 모회사 KDB산업은행은 “부실이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고의로 은폐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우건설 모로코 현장에서 사고가 난 게 지난해 말이다. 화력발전소 열교환기에서 결함이 발견됐다. 지난달 하순 대우건설 직원들 사이에선 이미 ‘손실 규모가 3000억 원’이라는 말이 돌았다. 물론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쉬쉬했다.

그럼에도 매각 작업은 진행됐다. 산은은 호반건설을 지난달 31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리고 이달 8일 대우건설 실적을 공시했다. 모로코 사업 손실 3000억 원이 정확히 반영된 수치였다. 내부의 소문과 차이가 없었다. 산은은 공시 사흘 전인 5일에야 모로코 현장의 부실 규모를 보고받았다고 했다.

산은은 2011년 1월 3조2000억 원을 투입해 대우건설을 인수했다. 이후 지금까지 부행장 출신들을 대우건설로 내려보내 재무와 인사, 리스크 관리 등 경영 전반을 통제해 왔다. 송문선 현 대우건설 사장도 산은 부행장 출신이다. 대우건설에는 송 사장 말고도 산은 출신 경영관리단 3명이 근무 중이다.

만일 민간 기업이 다른 회사를 인수해 7년간 금고를 틀어쥔 채 경영을 했다면 공시 사흘 전까지 부실을 몰랐다는 소리를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직원들도 알던 공공연한 부실을. 실력이 없다고 시인하거나 자회사가 모회사에 부실을 숨기는 모럴해저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로코 현장은 산은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뒤인 2013년에 수주한 곳이다. 그때 이미 문제 발생 소지가 많다는 말이 대우건설 내부에서 나왔다. 부실 규모까지는 아니지만 모로코에서 사고가 났다는 보고는 1월에 산은에 접수됐다 한다.

이런 공기업을 상대하는 호반건설은 영리하고 단호했다. 호반은 인수 예상가격 1조6000억 원 중 3000억 원을 2년 뒤에 내기로 했다. 이런저런 조건이 붙긴 했지만 사실상 가격을 깎은 셈이다. 그럼에도 부실이 공시되자 바로 다음 날 인수 포기 선언을 하며 패를 던졌다.

호반이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서 ‘간 보기’만 했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자본금 1억 원으로 시작한 지방 ‘흙수저’ 기업이 조 단위 투자를 하려면 질리도록 간을 보는 게 당연하다. 3조2000억 원에 산 자회사를 반값에 팔면서 그 자회사의 간도 제대로 안 본 산은이 문제다. 호반은 자기 역할에 충실했고, 산은은 태만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면 산은은 대우건설의 해외 부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정확히는 몰랐던 것 같다. 알려고 하지 않았거나 속을 들여다봐도 이해하지 못했던 게 맞을 수도 있다. 민간 기업이라면 경영진이 무능하면 문을 닫을 가능성이 높다. 산은은 정부 보호를 받는 금융 공기업이다. 문 닫을 일은 없다.

산은은 대우건설 매각을 다시 추진할 것이다. 대우건설 지분을 갖고 있는 산은의 펀드가 내년 중 만료되는 데다 지난해 4월 정관에 명시한 비금융 자회사 신속 매각 원칙 때문이다. 이번 매각 실패로 대우건설의 시장가치는 더 떨어졌다. 민간 기업이 대우건설의 주인이라면 해외 부문을 축소하거나, 회사를 우량부문과 부실부문으로 쪼개 파는 등 자구책을 마련할 것이다. 하지만 공기업인 산은은, 그것도 현 정부에선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사업 구조조정에 손을 대면 인적 구조조정이 수반되고 노조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최근 들어 경제 곳곳에 정부의 역할이 부쩍 커졌고, 공공부문이 민간을 대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산은을 보면 그게 과연 맞나 싶다.

고기정 산업2부 차장 koh@donga.com


#kdb산업은행#대우건설 매각#호반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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