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특명, 일폭탄을 피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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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행복원정대 : ‘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6> 주말 직전 쏟아지는 업무지시



동아일보는 워라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웹뉴(웹툰·뉴스)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했다. 취재팀이 찾은 일과 삶의 붕괴 실태를 웹툰 작가들에게 보내 매회 관련 웹툰을 4컷짜리로 싣는다. 6회 ‘불타는 금요일’ 웹툰은 ‘파페포포’ 시리즈로 유명한 심승현 작가가 주말을 앞둔 금요일 퇴근 직전 상사의 업무지시로 괴로워하는 3년차 회사원 김현지(가명·여)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금요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의 한 가구회사 디자인팀 사무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하다. 화장실이 급했지만 서둘러선 안 된다. 소리가 나지 않는 ‘금요일용’ 플랫 슈즈를 신고 허리를 굽힌 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K 선배도 까치발을 들고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첩보영화 속 한 장면처럼 긴장감이 감돈다. 바로 그때!

“현지 씨 잠깐 와보세요.”

동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그들의 눈빛에서 안도와 연민이 교차한다. 이번 주 ‘불금’도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사무실 숨바꼭질은 금요일 퇴근시간마다 반복된다. 술래는 팀장. 20명이 넘는 팀원은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팀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주말을 앞두고 ‘일 폭탄’이 날아들 수 있어서다. 왜 이번에도 나일까.

“별 건 아닌데….” 등골이 오싹하다. 얼마나 대형 폭탄이기에 이런 밑밥을 까나. 문서 더미를 뒤적이던 팀장이 파일 하나를 건넨다. 어림잡아 80쪽은 돼 보인다. “내용 정리해서 월요일 오전까지 PPT(파워포인트) 만들어줘. 수요일 임원 보고야.”

‘화요일까지 만들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네” 하고 돌아서는데 팀장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린다. “앞으로 데드라인 맞춰 PPT 만들 일이 많으니까 확실히 연습해 놓아야 해.”

주말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마음을 다잡으려는 순간,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에 불이 났다. ‘나 이제 출발! 다들 늦지 마.’ 불금에 들뜬 친구들의 채팅 수다에 스마트폰을 구석에 엎어 놓았다. ‘오늘 못 가’라고 말하지 않아도 연락이 오지 않을 게 뻔하다. 분명 ‘현지는 또 야근인가 보네…’ 하고 넘어갈 거다.

토요일 오전 11시. 스마트폰 너머로 남자친구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카페 데이트야?” 카페에서 나는 일하고, 남자친구는 영화 보고…. 주말 우리의 일상이다. 1시간 뒤 남자친구가 노트북을 들고 나타났다. 오늘은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를 다운로드해 왔단다. 옆에서 턱을 괴고 영화를 보는 남자친구 모습이 짠하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팀장이다. “지금까지 한 것 좀 보내봐.” 중간점검이다. 잠시 뒤 팀장은 “검토해봤는데 4페이지에 PPT 효과를 줬으면 좋겠어. 손짓을 하면 글씨가 튀어나오는 거 있잖아.” 휴대전화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2년 전 파릇한 신입사원 때는 바쁜 시간을 쪼개 친구들을 만나 회사 ‘뒷담화’를 하는 게 낙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끊임없이 불만을 토해내는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더욱이 주말에도 일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보니 점점 말수가 줄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무슨 일 있어? 얼굴이 흙빛이야”란 말을 듣기 일쑤다. 그때도 난 딴생각을 한다. ‘얼른 가서 자료 정리해야 하는데….’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심지어 회사는 휴가를 앞두고 일 폭탄을 날렸다. 지난해 여름휴가 때다. “휴가 잘 다녀오고, 쉬다가 고객사 한번 만나봐.” 휴가 이틀 전 팀장이 말했다. 고객사와의 미팅은 휴가 기간 중간에 잡혀 있었다. 위약금을 물면서 코타키나발루 비행기표를 취소해야 했다.

팀장만 ‘공공의 적’이 아니다. 금요일 오후 ‘이번 주말은 쉴 수 있겠지’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회사 선배가 화들짝 놀라 후배들을 소집했다. 월요일까지 보고할 수납장 디자인 자료를 깜빡 잊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건 꼭 금요일 오후에 생각날까. 서로 눈치를 보며 폭탄 돌리기에 들어가면 결국 팀 막내가 떠안는다. 후배에게 ‘조금 지나면 나아질 거야’라고 위로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오랜만에 지방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저녁을 챙겨주며 물었다. “이제 좀 편해졌니?” 밥을 한술 떠 입에 넣는데 눈물이 났다.

▼ 직장인 1007명 “팀장님 워라밸 노력 5.32점” ▼

“상사병 때문에 ‘일하기실어증’에 걸릴 지경이다.”

‘상사병’은 남녀 간에 그리워하는 ‘상사(相思)’병을 직장 ‘상사(上司)’로 바꾼 신조어다. 과도한 업무 부담을 안겨 부하직원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직장상사 때문에 화병이 난다는 의미다. 그런 직장상사에 지쳐 말이 안 나오는 상황을 ‘일하기실어증’이라고 한다. ‘싫어’와 ‘실어(失語)’의 발음이 유사한 데서 비롯됐다.

직장인 사이에서 이런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직장상사는 워라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일생활균형재단 WLB연구소가 지난해 10월 직장인 1007명을 대상으로 ‘직장상사가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하느냐’고 물은 결과 5.32점(10점 만점)에 그쳤다.

응답자의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직장상사의 워라밸 노력 점수가 높았다. WLB연구소는 “고소득인 경우 관리자 집단이 많은 반면 저소득일수록 시간제 혹은 단기근로가 많다”며 “회사 내 위치와 채용 형태에 따른 복리후생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합한 결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워라밸 붕괴를 직장상사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한다. 팀장이나 부장 등 직장상사도 조직 내에서 누군가의 부하직원이기 때문이다. WLB연구소 안선영 연구원은 “직장상사가 개인 차원에서 노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회사 내 워라밸 전담팀을 구성해 워라밸 제도가 정착하도록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잡학사전 : 신입사원휴가
입사 1년 미만 근로자는 한달 개근하면 1일 휴가


‘사용자는 근로 기간이 1년 미만인 근로자에게 1개월 개근 시 1일의 유급휴가를 줘야 한다.’

근로기준법 60조 2항이다. 이에 따라 신입사원이 1년 개근하면 11일의 유급휴가가 생긴다. 하지만 근로기준법 60조 3항은 신입사원이 이 휴가를 사용하면 이듬해 연차휴가에서 차감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신입사원이 입사연도에 3일의 휴가를 사용했고, 이듬해 연차휴가가 15일 생겼다면 실제로는 3일을 차감한 12일만 사용할 수 있다. 올해 5월 29일부터는 이 3항을 삭제한 개정안이 시행돼 신입사원이 연차를 쓰더라도 이듬해 연차에서 차감하지 않는다. 신입사원도 ‘1년 차 휴가’를 온전히 보장받게 되는 셈이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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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불금#일폭탄#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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