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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신치영]무혈입성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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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신치영]무혈입성의 유혹

신치영 경제부장 입력 2018-01-23 03:00수정 2018-01-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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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장
2014년 12월 이순우 우리은행장의 연임 포기는 지금도 한국 금융 흑역사의 한 장면으로 회자된다. 우수한 실적, 임직원들을 통솔하는 리더십, 공적자금 회수를 위한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금융당국의 두터운 신임…. 이 행장은 연임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 이 행장은 어느 날 돌연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그날 밤 자택을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 행장은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내가 차기 행장이 되면 이 조직은 난장판이 된다.” 그리고 며칠 후 이광구 부행장이 새 행장으로 확정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의 궁금증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풀렸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3명을 ‘검증 대상’으로 청와대에 올렸다. 청와대는 2014년 11월 하순 신제윤 금융위원장에게 이순우 행장의 연임을 재가했고, 신 위원장은 이 행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청와대로부터 신 위원장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이순우 말고 이광구로 하세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금융위 고위 당국자가 친분 있는 국가정보원 관계자에게 상황 파악을 부탁했다. 며칠 뒤 그의 입에서 나온 청와대 내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인 A 씨의 이름. “사업하는 친구의 민원 등 사적인 부탁을 이광구 부행장에게 몇 번 했는데 일처리에 흡족했답니다. A 씨가 뒤집었다는군요.”

은행 최고경영자(CEO) 인사만 한 복마전도 드물 것이다. 정권 줄 대기, ‘더 센’ 줄을 타고 내려오는 낙하산, 경쟁자 간 암투, 노조와의 결탁, 청와대 투서…. 상상 이상의 스토리들이 숨어 있다. 정확한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3연임을 둘러싼 김 회장과 금융당국 간 정면충돌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엔 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드라마적 요소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이 협공으로 김 회장을 옥죈다. 두 사람은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이 추천했다. 그리고 세 사람과 끈끈한 고려대 인맥으로 얽혀 있는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 장 실장과 친분이 각별하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이 후계자로 선택한 김 회장과 등진 지 오래다. 김 전 회장이 장-최-최 라인과 결탁해 김 회장을 찍어 내리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당국에 맞서지 말라’는 금융계 금언(金言)에 맞선 김 회장의 행보는 더욱 궁금증을 키운다. “금융회사 인사에 개입하지 말라”는 청와대 경고가 나오고 금융당국은 한발 물러선다. 김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경남고 동기라는 점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지만 문 대통령의 성품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떤 사연이 숨어 있든 이번 일이 한국 금융의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건 분명하다. 정권은 민간 금융회사 수장을 흔들고 현직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외이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한다. 사외이사들은 독립적인(Independent) 이사가 아니라 외부(Outside) 이사일 뿐이다. 금융당국이 제기한 ‘셀프 연임’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궁금한 건 역대 정권은 왜 제도를 고치지 않고 항상 특정인을 쳐내려고 안간힘을 쓰느냐는 것이다.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여 경영진을 견제하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우선 아닌가.

투명한 지배구조를 만들면 낙하산을 내려보내기 어려워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살 만하다. 지금처럼 은행을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만들어 놓고 언제든 입맛에 맞는 인사를 ‘무혈입성(無血入城)’시키려는 의도와 다름없다. 은행 지배구조를 문제 삼는 정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신치영 경제부장 higgledy@donga.com


#이순우#한국 금융 흑역사#금융위원회#신제윤#김정태#하나금융지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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