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사이버 진지전’…뒤늦게 뛰어든 보수는 성과 낼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1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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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직 외교관 100인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조원일 송종환 최병구 전 대사 등은 유튜브에도 자신의 얼굴과 주장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시국선언문에서 주장했던 대로 문재인 정부의 친중 성향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이로 인해 소원해지는 한미관계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 문안도 소셜미디어 상에서 온라인으로 조율해 서명했다고 한다.

당시 선언문을 보도한 기사나 유튜브 영상에 댓글을 단 사람들은 보수적인 중년 이상 남성 누리꾼들이 주류인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과 디지털을 통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미루어 매우 활동성이 강했다. 일군의 중견 언론인은 최근 인터넷TV와 언론사를 만들어 사이버 공간에서 보수적 담론을 발신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문득 2016년 겨울 한국사회를 휩쓴 촛불시위 당시를 떠올리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독선,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비록 잘못됐지만 대한민국 산업화 세력의 가치와 성과, 정통성까지 깡그리 휩쓸려간다고 생각한 이들은 ‘태극기 부대’라는 이름으로 토요일마다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집에서 TV를 보며 울분을 터뜨리던 옛 친구를 불러낸 수단은 바로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전유물이던 디지털 플랫폼이었다. 폴더형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동주민센터 무료 강좌를 수강하며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계정을 연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20일 오후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이들은 북한 김정은의 신년 대남 ‘매력 공세(charming offensive)’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이버 대응을 하고 있다.

상황은 2002년 대통령선거 전날인 12월 18일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단일화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때를 연상시킨다. 노 후보가 선거날 새벽 정 대표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리던 장면에 공분한 젊은 진보 누리꾼들은 휴가를 즐기려던 친구들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투표장에 불러냈다. 이때의 ‘쾌거’를 대대로 공유, 발전, 확산시켜온 결과가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강고한 사이버 지지 세력 아닐까.

우파 마르크시스트인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 정치에 ‘사이버 진지전(陣地戰)’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것 같다. 유명한 ‘옥중 서신’에서 그는 ‘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은 ‘이들 나라의 사회주의 전위당(vanguard party)은 시민사회 영역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때문에 국가 영역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와 언론, 출판과 교육계 등을 통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후진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의 대중처럼 순진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중요 선거는 정당과 후보의 오프라인 집회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전에 결과가 좌우되고 있다. 도대체 왜 졌는지도 모르고 이회창 후보의 정계은퇴를 바라봐야 했던 한국 보수는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몰락 속에서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보수의 사이버 진지 전력에는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고립 분산적인 네트워크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 탄핵 사태로 붕괴된 기성 보수 정치권은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못 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사이버 진지전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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