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임우선]노동시간 단축, 제1의 교육정책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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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예전에 시골의 한 초등학교로 취재를 갔다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후 4시쯤 전교생이 스쿨버스를 타고 하교하기에 당연히 집에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두 명의 아이를 빼고는 모두 지역아동센터로 간다고 했다. 다문화가정이 많고 아빠가 퇴근하기 전에는 마땅히 숙제를 봐줄 사람도 없다 보니 공부부터 저녁밥까지 모두 지역아동센터에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집엔 오후 8시가 넘어 가는데, 사실상 아이들에게 집이란 씻고 잠만 자는 곳이라는 게 교사의 설명이었다.

집이 ‘씻고 잠만 자는 곳’인 건 서울 등 도시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는 맞벌이 부부 자녀에게는 어린 나이에도 집에 머무를 권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많은 아이들이 아침부터 이른 오후까지는 어린이집이나 학교, 그 이후는 방과후 교실과 돌봄교실, 학원 등 ‘각종 기관’을 전전한다. 초등학교 2학년과 7세 자녀를 둔 한 직장맘은 “남편도 나도 툭하면 야근이라 아이들 학원을 최대한 빡빡하게 오후 8∼9시까지 짜뒀다”며 늘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도시고 시골이고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집을 떠나 사는 경우가 많은 이상한 나라다. 물리적으로 ‘집’은 있지만 온정을 느낄 수 있는 ‘가정’은 없는 아이들이 많다. 한국의 ‘집’이 ‘가정’이 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집에 엄마 아빠가 없어서다.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긴 노동시간 때문이다. 부모에게 집이 ‘씻고 잠만 자는 곳’이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집이 결코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가정이 없는데 가정교육이 될 리 없다. 많은 경우 부모들은 아이가 ‘사건’을 일으킨 뒤에야 아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 교사는 “집에서도 챙기지 못한 아이를 학교와 사회 탓만 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며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인데 갈수록 가정에서 안정감을 못 느끼는 아이들이 많아진다”고 걱정했다.

가정의 역할은 가정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가정을 못 느낀 아이들이 커서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도 염려스러운 부분이다. 한국은 현실적으로 부모 교육조차 전무한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교사나 학원도 엄마 아빠의 역할을 대신할 순 없다. 부모와의 교감 속에서 아이들은 가정의 유대감을 체험하고 정서적 성장을 이룬다. 최근 부모답지 못한 부모들이 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서 수십 년간 한국에 ‘가정’이 아닌 ‘집’만 많아진 탓인지도 모른다.

정부는 그간 저출산 비상이라며 국민들의 결혼과 출산을 독려해 왔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결혼과 출산을 해도 정작 그 이후에는 긴 노동시간에 가정을 일굴 권리를 박탈당하는 게 한국인의 삶이다. 한국의 밤낮 없는 노동시간을 해결하지 않는 한 정부의 온갖 저출산 대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각종 보육정책과 교육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정부 역점과제로 ‘근로시간 단축’을 강조했다. 경제정책의 관점에선 논란이 큰 이슈다. 그러나 교육의 관점에선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엄마 아빠를 집으로 돌려보내 아이와 가정을 누리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시급한 제1의 교육정책이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노동시간 단축#다문화가정#맞벌이 부부#가정#가정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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