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하정민]대치동 엄마 K의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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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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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다둥이 엄마 K(38)입니다. 7세, 5세, 4세, 2세 올망졸망한 애 넷 키우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죠.

저는 지난해 7월 대치동에 온 ‘새내기 맘’. 대치동 지리도 익숙지 않은 제가 요즘 예전에 살던 동네 엄마들에게서 하루 수십 통의 문의 전화를 받느라 바쁩니다. 집값이 자고 나면 수천만 원씩 오르는 데다 정부가 유치원·어린이집 영어 수업을 금지하려 한다는 소식에 그렇지 않아도 사교육 메카인 대치동 학원가가 문전성시거든요. 비록 전세살이지만 저도 대치동 상황에 대해 몇 자 적어봅니다.

강북에서 나고 자란 저는 대치동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애들을 쥐 잡듯 잡아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극성 엄마들의 소굴로만 여겼죠. 하지만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오니 남편이 대치동행을 강력히 주장하더군요. 돌잡이 막내를 등에 업고 2주 만에 이사를 마치느라 아직도 온몸이 뻐근합니다.

이사 직후 초등생 전용 영어학원 ‘빅3’라는 ‘I××, 렉××, 트××’를 돌았습니다. 수업료는 예상보다 비싸지 않았고 미국 교과서를 토대로 만들었다는 교재도 인상적이더군요.

가장 놀라웠던 건 “영어는 무조건 초등학교 때 끝내야 해. 그래야 중고교 때 수학과 과학에 ‘올인’할 수 있어. 압구정동 주민처럼 자식에게 빌딩을 물려주거나 해외 유학을 턱턱 보내줄 수 있는 진짜 부자(?)가 아닌 우리는 애들 교육이라도 잘 시켜야 돼”라는 주변 엄마들.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대치동에 너무 늦게 왔나’란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대치동에 오래 산 엄마들은 “최근 집값은 정부가 올려놨다”고 하죠. 지난 몇 년간 대치동 학원 경기가 예전만 못 했답니다.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해서 기존 일자리가 없어지는데 ‘똑똑한 월급쟁이 돼 봤자 별것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는 거죠. 자율형사립고와 국제중고교가 강북과 지방에 세워지자 발 빠른 엄마들이 먼저 ‘대치동 탈출’을 선언했고요.

그런데 정부가 자사고와 외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고 영어 수업까지 금지한다니 초등학생과 미취학 아동을 중심으로 대치동 입성 전쟁이 다시 벌어진 겁니다. 요즘 대치동 유명 학원에 다니려면 입학 여부를 결정짓는 시험조차 대기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살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집은 제한돼 있으니 학원가 한복판에 세워진 대치동 신축 30평대 아파트가 23억 원이란 악 소리 나는 호가에도 매도자가 없는 거죠.

제가 사는 집도 6개월 만에 3억 원이 넘게 올랐습니다. 당연히 1년 반 후 전세 재계약 때 그만큼 전세금을 올려줘야겠죠. 집이 있는 엄마들 상당수도 이 상황을 반기진 않아요. “‘떼부자’나 ‘사회악’으로 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세상이 내 새끼한테 좋을 것 같지도 않다”고 합니다.

밤톨만 한 제 아이들도 제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더 합니다. 어른이야 오죽할까요. 강남에 살 이유가 늘었는데 정부에서 “사지 마. 나빠” 한다고 그 말을 듣겠습니까. 게다가 최소한 정부 안에서는 손발을 좀 맞추셔야죠. 경제 정책은 부동산 규제와 세금을 강화한다면서 교육 정책으로는 없던 대치동 수요까지 생겨나도록 하니 이 무슨 엇박자입니까.

※지난해 7월부터 대치동에서 거주 중인 주부 김 모씨(38)의 이야기를 각색했습니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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