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수용]어느 진보의 사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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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용 논설위원
홍수용 논설위원
진보인사 A가 6개월 전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서 내 칼럼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가 이달 20일 전화로 사과하고 해당 게시문을 삭제했다. 그의 소속이나 직책조차 밝히지 않는 것은 16분 통화에서 5차례 사과한 사회 저명인사에 대한 예우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러나 블로그 글은 2만 번 이상 조회됐고 수십 번 퍼 날라졌다. 엎질러진 물그릇만이라도 바로 세우고 싶다.

A가 지적한 글은 5월 19일 본보에 게재된 ‘법인세의 진실, 노무현은 알았다’는 칼럼이다. 노무현 정부조차 높은 법인세 부담이 경제 성장에 부정적이라고 봤다, 그러니 증세에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칼럼 후반부 ‘세 부담의 4분의 1 정도는 가격 인상과 신규 고용 위축의 형태로 소비자와 근로자에게 넘어온다’는 문장이 A를 자극했다. 그 분야를 오래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숫자를 단정적인 톤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혹시 몰래 연구를 해서 세계 경제학계를 깜짝 놀라게 할 결과라도 얻은 것인가’라고 블로그에서 물었다.


세금 전가 폭 ‘4분의 1’은 재정학자들이 널리 알고 있는 숫자이지 깜짝 놀랄 연구가 전혀 아니다. 2006년 한국조세연구원 김승래 박사는 ‘법인세 개편의 세 부담 귀착 효과 분석’이라는 용역보고서를 내놨다. 그 결과는 노무현 정부의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에 반영돼 법인세 부담이 소비자에게 17%, 노동자에게 8.5%, 자본에 74.5% 전가된다고 명시됐다. 소비자와 노동자에게 넘어가는 몫을 합하면 25.5%, 즉 4분의 1 정도다. ‘세 부담의 4분의 1 정도는…’이라는 짧은 문장에는 국책연구원의 연구자가 세금의 파장을 분석하고 정부가 그 결과를 인정한 길고 복잡한 과정이 녹아 있다. 그럼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아 오해의 소지를 남긴 것은 내 잘못이다.

A에게 이 연구를 한 김승래 박사나 다른 유사 논문을 아는지 물었다. “누가 어떤 연구를 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는 답에 놀랐다. 국내 연구 실태도 모르면서 칼날부터 세운 것인가. 그는 평소 근거 없는 ‘사이비 경제학’이 문제라고 지적한 사람인데 정작 본인이 근거도 없이 비판한 셈이다.

이어 A는 어떤 한 사람의 연구를 정설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김승래의 연구는 개인 저작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조세개혁보고서에 인용된, 진보정부 세법의 토대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 그쪽도 잘못한 것”이라는 그의 반박에서 할 말을 잃었다. 한 연구를 그냥 인정해서는 안 되고 후속연구를 기다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는 임기 내 보고서 하나, 정책 하나도 나오기 어렵다. 무엇보다 한국경제연구원 조경엽 박사 등 김승래의 분석을 인용한 학자는 많다. A는 법인세 인상 말만 나오면 반대부터 하는 보수학자들을 비판하려 했을 뿐 당신은 유탄을 맞은 셈이라고도 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이라고 전제를 달지 그랬냐는 아쉬움도 전했다. 대화는 산으로 가고 있었다.

A를 이해한다. 그는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지만 상아탑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다. 보수와 충돌하면서 진보의 관점에서 사회적 이슈를 비판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그가 사과하고 많은 후학들이 본 글을 스스로 지운 것은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시장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보수 민주주의’와 시민의 참여를 중시하되 기업의 힘을 최소화하려는 ‘진보 민주주의’가 부딪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A에게서 그를 싸고 있는 좌파 진보의 프레임을 봤다. 그가 내 글을 보자마자 분노를 쏟아낸 것은 내가 보수의 프레임에 파묻혀 있다고 단정해서일지 모른다. A를 겪으면서 이런 평행 상태로는 생산적인 논쟁이 어렵다는 것, 그럼에도 토론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알았다. 나도, 그도 프레임에서 나와야 한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진보인사#법인세의 진실 노무현은 알았다#노무현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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