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발걸음 빠르고 지리 손바닥 보듯 꿰뚫어… ‘품삯’ 만만치 않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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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배달부 ‘전인’

입에는 장죽을 물고, 한 손에 우산을 든 조선 말기의 우편배달부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입에는 장죽을 물고, 한 손에 우산을 든 조선 말기의 우편배달부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다 뒤져보니 겨우 70푼이 있는데, 전인(專人) 이놈은 두 냥이 아니면 안 가겠다고 하는구나. 네 어머니에게도 돈이 없고, 네 형도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조병덕(1800∼1870)의 편지에서

조선시대 편지는 주로 인편(人便)으로 전했다. 인편이 닿지 않으면 편지를 써두고 기다렸고, 일정과 행선지가 맞는 사람을 찾으면 밀린 편지를 한꺼번에 써서 전했다. 충청도에 살았던 조병덕은 서울에 사는 아들과 편지를 1700여 통이나 주고받았다. 그 역시 인편을 찾으면 밀린 편지를 급히 썼다. 많은 편지를 몰아 밤늦도록 쓰느라 눈병이 악화돼 괴롭다고도 썼다. 그만큼 때맞춰 인편을 찾아 보내기란 쉽지 않았다.

품삯을 받고 편지 배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전문 배달꾼도 있었다. 이들은 전인, 전족(專足), 전팽(專K)이라고 불렸다. 전인은 그 나름대로의 전문성이 필요했다. 주소가 없던 시대에 사는 곳과 이름만 듣고 편지를 전달했기 때문에 수취인이 사는 곳 지리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야 했다. 물어물어 수취인을 찾아야 하니 말귀도 밝아야 했고, 먼 길을 일정에 맞춰 다녀갈 빠른 발걸음도 필요했다.

노잣돈과 품삯은 일정과 거리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먼 거리를 급하게 갈 전인의 품삯은 만만치 않았다.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 방자를 불러 “10냥을 주고 솜옷도 한 벌 해줄 테니 이몽룡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다. 방자를 전인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조선 후기 서울 임금노동자 하루 품삯이 25푼 남짓이었으니, 춘향이는 40일 치 임금과 옷 한 벌을 품삯으로 제시했던 셈이다.

원하는 지역을 원하는 일정에 갈 수 있는 전인을 딱 맞게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인을 주선하던 중개인도 있었다. 급히 보낼 편지가 있던 조병덕은 인편이 어려워지자 서업동이라는 중개인을 만났다. 서업동은 행선지, 날짜, 노잣돈에 맞춰 송금돌이라는 이름의 전인을 주선했다. 중개인 없이 전인을 직접 구하면 흥정이 쉽지 않았다. 전인이 높은 가격을 부르면 고리로 빚을 내기도 했다. 70푼밖에 없던 조병덕은 두 냥을 마련하려고 빚까지 얻었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비용 일부를 수신자가 착불로 부담했다.

민가에서 전인이 활약했다면 궁은 ‘글월비자’를 두었다. 글월비자는 색장나인(色掌內人·시중을 들던 궁녀) 밑에서 심부름을 담당했다. 그들은 전인이 드나들지 못하는 궁 안팎에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고, 허리에 검은 띠를 매어 글월비자임을 표시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들 정조를 두고 “노모 마음을 헤아려 서울 성내 거둥이라도 궁을 떠나시면 안부를 묻는 편지가 끊이질 않으시더라”라고 썼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수시로 보낸 편지도 글월비자가 전달했을 것이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선 우편배달부#전인#글월비자#혜경궁 홍씨#한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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