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일호]개 키우는 것보다 나은 정치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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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선물로 받은 강아지, 과거 안좋았던 기억 때문에 한동안 멘붕에 빠져
이제는 적응 위해 노력 중
낯설고 불편해도 때로는 미래 위해 변화 받아들여야
촛불 1년, 시민은 성숙해졌으나 정치는 여전히 대립만 난무
적폐청산 당연하지만 미래 청사진도 보여주어야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지난 어버이날 일이니까 여섯 달이 되어간다. 아이들이 어버이날 선물이라고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들여놓으면서 필자는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어릴 적 옆집 개에게 물렸던 일, 집에서 키우던 개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던 일, 집 안 여기저기 쌓이고 흩날리는 개털로 힘들었던 일 등이 생각나면서 개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 아이가 장성해 이제는 한 명씩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낯설고 새로운 생명체 하나가 들어와서 집 안 구석구석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끙끙대다가 집사람을 설득하기로 했다. 별의별 핑계를 만들어 강아지를 내보내자고 꼬드기기도 하고 협박도 했지만, 집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자기도 동조자였으니 설득이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들고, 약간의 배신감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그 후 강아지 집, 밥, 장난감 등 별별 물건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익숙한 집 안 풍경이 망가져 갔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고, 강아지가 들어온 후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각자의 일에 바쁘고 집에 들어오면 자기 방으로만 들어가던 식구들 사이에 강아지를 중심으로 모이는 공통 공간이 생겼고, 화제도 하나 더 늘었다. 강아지 돌보는 일을 같이 해야 한다는 서로간의 의무감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버이날을 빙자한 자기들의 선물이었지만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아서 필자도 받아들이기로 했고, 지금은 노력하면서 적응하고 있다. 강아지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집에 두고 나오면 걱정이 되고 가끔 데리고 산책도 나간다.

지금까지 살아온 태도를 바꾸어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평소 지나는 길, 즐겨 가는 곳, 익숙한 일에서 크게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필자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내년이면 예순이 되는 나이 탓인지 필자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어떤 친구는 변화 없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마음을 단순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고 안정감을 준다고 말한다. 변화가 싫고 두렵다기보다 요즘같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우리 스스로 중심을 잡고 가만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필요하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렇게만 될 수 있을까. 때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때로는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명분과 그 변화로 인해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개인의 일에만 그칠까. 사회도 마찬가지고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9일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년 되는 날이다. 많은 개인이 모여 사회와 나라를 향해 변화를 외치기 시작했던 날이다. 그것은 특정한 몇 사람을 위한 것도, 특정한 몇몇 집단의 몫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노인, 중고교생,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워 나온 주부까지 전국 1600만여 명이 모여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민심을 보여준 일이었다. 우리 모두의 피부에 와 닿는 삶 속의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서 사회와 나라가 달라지고, 아이들에게 달라진 세상을 물려주자는 다짐의 장이기도 했다. 폭력적인 정치적 행동이 아닌 문화적 축제 같은 형태로 표출되었기에 그 요구가 더 정당하고 성숙된 것으로 보였고, 정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1년이 지난 지금은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적폐다, 새로운 적폐다 하는 첨예한 정치적 대립만 보이고, 정치인들의 복잡한 셈법만이 난무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던 변화는 아니었는데, 변화는 고사하고 도로 그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가 다르게 신문을 뒤덮는 끔찍한 사건들이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자국의 이익만 앞세우는 주변국들의 정치적 계산과 안보 상황도 불안해 보이는 현실을 두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런 불안함과 긴장감으로부터 안정된 마음을 이루게 해주는 일임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일보다 정치가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국민 대다수와 함께하는 공통 공간과 공통 화제와 공통의 의무감을 나누어 갖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쌓인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데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함께 제시되고 공유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으니 국민이 불안해하고 피로감을 느낀다. 올바른 방향인지 새로운 적폐인지에 대해 정치가 답해 주어야 할 때인 것 같다.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개#강아지#촛불집회#적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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