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10월 17일]박정희, 1972년 ‘10월 유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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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10월 16일 15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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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당시 특별선언를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동아일보DB
1972년 당시 특별선언를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동아일보DB

1972년 오늘(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나중에 ‘10월 유신’이라고 부르게 될 선언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①이날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효력을 정지시킨다.
②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 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비상 국무회의는 그해 12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④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을 정상화시킨다.

박정희 대통령의 10·17 특별선언 내용을 전한 1972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1면
박정희 대통령의 10·17 특별선언 내용을 전한 1972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1면

박 전 대통령이 위헌적 요소가 다분한 이 선언을 발표하면서 명분으로 삼은 건 ‘평화통일’이었다. 그해 7월 4일 박 전 대통령과 김일성 당시 북한 내각 수상은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평화 통일 3대 원칙을 발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극체제 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대화 같은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 선언 말미에는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고 강조했다.

1972년 11월 21일 개헌 투표장에서 표를 던지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가족. 왼쪽은 육영수 여사, 가운데는 맏딸 박근혜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1972년 11월 21일 개헌 투표장에서 표를 던지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가족. 왼쪽은 육영수 여사, 가운데는 맏딸 박근혜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개헌 투표를 진행한 건 그해 11월 21일이었다. 이날 전체 유권자 중 91.9%가 투표에 참여했고 91.5%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 투표 결과가 액면가 그대로 국민 의사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 여지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0·17 특별선언 이후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정치 집회 및 시위는 금지 됐다. 모든 언론 보도 내용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요컨대 이 투표는 개헌 반대 쪽 의견을 원천봉쇄한 가운데 진행됐던 셈이다.

새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 선거 방식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행정·입법·사법 3권을 모두 가진 채 종신 집권할 기틀을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12월 23일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해 통일주체국민회의 2357명의 100% 찬성으로 제8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1972년 12월 27일 열린 제8대 대통령 취임식.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 장소와 취임식 장소가 서울 장충체육관이었다.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뽑힌 제11대 (전두환) 대통령까지는 ‘체육관 대통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통령기록관.
1972년 12월 27일 열린 제8대 대통령 취임식.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 장소와 취임식 장소가 서울 장충체육관이었다.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뽑힌 제11대 (전두환) 대통령까지는 ‘체육관 대통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통령기록관.

박 전 대통령은 1978년 7월 6일 실시한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효표 1표를 제외하고 2577표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임기 6년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듬해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신체제도 막을 내렸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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