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부모의 불안, 자식의 우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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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이번 추석 연휴는 대한민국 5000년 역사에서 가장 길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끝났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불편한 일은 없으셨나요? 그 자리에서 금해야 되는 주제는 늘 결혼, 출산, 취직, 승진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부모님의 말씀에 악의가 있었다고 생각은 안 하시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으셨을 겁니다. 저도 오래된 일이지만 “이제 셋째를 낳아야지!” 하시는 말씀에 아내와 갑자기 문제가 생겨 한참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의사가 진단을 하고 환자를 위해 약을 처방하듯이 좋은 뜻에서 말씀하셨겠지만 갑작스럽게 내놓으신 약은 더 쓰고 삼키기가 거북하기 마련입니다.

덕담도 지나치면 추궁이나 비판이 됩니다. 추석이나 설날에 특히 집중되는 이런 일들은 작년에도 있었고 내년에도 되풀이될 겁니다. 추석 연휴 동안 사상 최대의 출국 행렬이 이어진 데는 아마 이런 곤란한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엉뚱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정신과 의사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정신과 의사의 진료는 크게 두 방향입니다. 우선 환자의 증상들로 진단하고 약물을 처방하는 진료입니다. 다른 하나는 말을 쓰는 ‘정신역동적 정신치료’입니다. 인지행동치료도 말로 하지만 이 글에서는 정신치료에 집중하려 합니다. ‘정신역동’은 마음의 움직임을 다룬다는 뜻입니다.

정신과 의사, 이어서 교수로 30년 넘게 살며 제자들을 가르칠 때 어려웠던 점은 이미 병동 환자를 진료하면서 약물 처방에 익숙해진 전공의들에게 정신치료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약물치료가 증상을 살펴 환자의 병을 판단해 치료하려는 행위라면 정신치료는 아주 다르게, 판단이 아닌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전공의들의 익숙해진 생각과 행동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일도 힘듭니다.

약물치료의 목표는 아직까지 증상 해소입니다. 뇌과학의 발달로 정신 증상이 생기는 기전을 비교적 많이 알게 되었지만 약물로 정신질환을 뿌리 뽑을 때가 왔다고 하기는 무리입니다. 정신치료의 목표는 아주 다릅니다.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둡니다. 증상 해소는 자연히 따라온다고 봅니다. 역설적으로 증상만 너무 일찍 해소되어 치료가 중단된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삶의 질을 높이려는 정신치료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시간도 충분히 써야 합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귀만 열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색다른 방식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하고 상징과 환상도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정신치료자의 ‘특별한 청력’은 꾸준한 수련과 노력의 결과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은 치료자가 젊은 치료자보다 더 잘 듣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정신치료자는 환자가 하는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고유성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치료자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특별합니다. 고유한 입장에서 그 사람을 증상이 아닌 사람 전체로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매번 만날 때마다 이해된 바를 축적시켜 환자가 걸어온 삶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정신치료자의 길은 삶에 대해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이야기꾼이 되는 길입니다. 치료자는 자신이 다시 편집한 이야기를 환자에게 들려주어서 그 사람이 모르고 있던 부분을 알고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약물치료는 처방 행위를 통해 환자의 몸 안에서 약물이 작용하도록 합니다. 몸에 흡수된 약물은 성분의 특성에 따라 약효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좋은 약은 덜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말로 하는 치료라고 부작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약물 부작용은 약물이 몸에서 대사와 배설 과정을 거치면 대개는 없어지지만 말의 부작용은 오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추석과 설날이 두려운 겁니다.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서도 말은 가려서, 용량과 시점을 잘 고려해서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판단을 기반으로 강요하기보다는 공감과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 나가야 합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옳고 그름은 당장 알기 어렵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미래(未來)는 아직 걷지 않은 길입니다.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서로 간에 판단보다는 이해를 앞세워야 합니다.

부모의 말은 자식이 겪을 앞날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에서 나옵니다. 이미 만만하지도 않고 점점 늘어가는 나이에 아직 짝을 구하지 못한 아들의 앞날이 불안합니다. 애써 배우고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딸의 처지가 걱정됩니다. 불안은 늘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에 관한 겁니다. 현재만으로도 힘겨운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마음에 더 아프게 꽂힙니다.

자식이 겪는 마음의 상처는 우울로 이어집니다. 불안이 미래에 관한 기분이라면 우울이라는 감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울은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견고해서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자식은 부모에게 격하게 반응합니다. 격한 반응은 부모의 충격과 우울로 이어집니다. 가족 관계는 소원함, 심하면 단절의 단계로 진행됩니다.

정신치료자는 경찰이나 검찰이나 법원의 역할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치료자는 치료 시간에 환자를 이끌지 않습니다. 따라가면서 환자가 흘린 말 속에서 단서를 찾으려 애씁니다. 충고나 조언을 삼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가고자 하는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신치료를 한다고 내세우는 전문가(?)가 충고나 조언을 남발한다면 자격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다 큰 자식에게 부모 역시 경찰, 검찰, 법원의 역할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운이 남아 있으면 뒤따라가면서 도움을 주고, 부모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저 멀리서 지켜보면 됩니다. 다시 강조드리면, 판단보다는 이해를 앞세워야 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부모의 말#자식의 상처#부모의 불안#자식의 우울#판단보다는 이해를 앞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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