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트리플 장벽’ 고달프지만… 더 커져야할 ‘서울대 기회 사다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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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기회균형전형 10년

모니터 앞에 앉은 유상훈(가명·24·서울대 4학년) 씨는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수강 신청 때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 씨의 수강 신청 기준은 남들과 다르다. 토론과 조별과제가 있는 강의는 ‘기피 1순위’다. 5년 전 친구들이 유 씨에게 던진 한마디 때문이다.

“아, 상훈이랑 같은 조 됐어. 망했다!”

유 씨는 2011년 지방의 한 공립고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기초생활수급가정의 자녀이지만 학교에서 늘 “공부 잘한다” 소리 듣는 모범생이었다. 기회균형특별전형(기회균형)으로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까지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21일 기자와 만난 유 씨는 “서울대생은 저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말했다.

○ 성적·가난·냉대에 우는 학생들

서울대 기회균형은 올해 10년을 맞았다. 학력과 계층의 대물림을 막자는 취지로 2008년 도입됐다. 이를 통해 1500명가량이 서울대생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기회균형 입학생 비율을 5%에서 7%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기회균형의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을 먼저 고쳐 달라고 호소한다. 본보는 기회균형 출신 서울대생 12명(2명은 졸업생)을 심층 인터뷰했다. 특목고와 자율형사립고 출신 3명, 일반고 출신 9명이다. 학업 부진과 경제적 어려움, 주위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온 학생들이다.

유 씨의 1학년 첫 학점은 1.3(4.3점 만점). 학사경고를 받았다. 수업이 어려워 3년간 3차례 휴학했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고깃집 서빙과 공사현장 보조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일이 끝난 자정부터 학교 도서관에서 예습했다.

“그래도 기회를 주셨는데, 열심히 해야죠.”

3학년 김정은(가명·21·여) 씨는 ‘바쁜 척’으로 유명하다. 모임 때마다 늘 빠져서다. 김 씨가 과외와 휴대전화 판매 등 ‘메뚜기 알바’로 3년째 생활하는 걸 아는 친구는 없다.

“‘과잠(학과 점퍼)’ 맞춰 입고 MT 가는 친구들 보면 자괴감이 들어요.”

김 씨의 집도 기초생활수급가정이다. 1학년 첫 학기 후 엄마에게 노트북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 엄마는 어디선가 빌린 돈으로 최신 노트북을 사줬다. 그는 한참을 울었다.

“친구들은 모두 노트북 쓰는데 저는 손으로 필기하느라 수업을 못 따라간 것 같았어요. 그때 엄마한테 ‘가난 때문에 시험 망쳤다’고 쏘아붙인 게 너무 후회돼요….”

○ ‘기균’ 낙인에 맞서는 학생들

올 4월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글이 올라왔다. 기회균형 학생의 지적 능력이 의심된다는 내용이다. ‘나의 노력과 성취에 흙탕물 튀기는 존재들’ ‘사회배려자 문신을 새겨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2012년 기회균형으로 입학한 공과대 신입생이 기숙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A 교수는 “학업 고민과 주변의 시선 때문에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김기현 교무처장은 “혹독한 경쟁을 뚫은 보상심리가 이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못하는 잘못된 현상을 빚은 것 같다”며 “엄격한 절차를 거쳐 잠재력을 인정받은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언행은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런 시선 때문에 더 독하게 마음먹는 학생도 있다. 3학년 한재준(가명·22) 씨의 별명은 ‘칠판 앞 재준’이다. 수업을 못 따라가면 옆자리 친구들을 붙잡고 질문 공세를 펼치기 때문이다. 신입생이던 2014년 그의 학점은 기숙사 입소 최저 기준인 2.7(4.3 만점)에 못 미쳤다. 기숙사에서 쫓겨난 그는 자취할 형편도 안 돼 해병대에 입대했다. 한 씨는 “다시는 나락으로 내몰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 온전한 ‘계층 사다리’가 필요하다

서울대 기회균형 학생 중에는 고군분투 끝에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이도 적지 않다. 졸업생 이민재(가명·26) 씨는 올 2월 국내 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이 씨는 “좋은 집안에서 선행학습한 친구들을 보며 학교에 수재들만 있는 줄 알았다”며 “1년쯤 지내 보니 학생들 유형이 제각각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다양한 인재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성적도 꾸준히 올랐다”고 말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이정미(가명·27·여) 씨는 “기회균형이 아니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서울대에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내가 잘해야 혜택을 보는 후배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힘을 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소외계층을 돕는 변호사가 되기를 꿈꾼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에 따르면 2013∼2017년 서울대 기회균형 입학생(805명) 분석 결과 1학년 1학기 평균학점은 3.01로 전교생 평균(3.24)보다 낮았다. 하지만 격차가 차츰 줄어 4학년 2학기에는 기회균형 학생의 평균학점(3.40)이 전체 평균(3.46)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희원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 연구부교수는 “기회균형 학생을 위한 영어 수학 등 기초과목 학습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히 어울리도록 심리적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회균형특별전형=2008년 서울대가 도입했다. 저소득층(기초생활수급가정, 차상위계층)과 농어촌·도서·산간 지역 출신 학생을 정원 외로 선발하는 제도다. 매년 전체 입학생의 5% 안팎을 뽑는다. 이후 다른 대학도 비슷한 전형을 도입해 시행 중이다.

김동혁 hack@donga.com·권기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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