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갑식]두고 온 손님 없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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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20일 올해 첫 1000만 영화가 나왔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성공 요인은 여럿일 것이다. 수준급의 완성도뿐 아니라 극장가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손님 중 한 사람인 나를 움직인 것은 극 중 김만섭(송강호)이 전화로 어린 딸에게 던지는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는 대사였다.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은 당시 어느 자리에 서 있었느냐에 관계없이 자유롭기 힘들다. 그것이 마음의 빚이든, 아니면 복합적인 감정이든 말이다.

하지만 영화로 광주를 마주하는 것은 좀 다르다. 영화와 드라마, 가요 등 문화상품은 자신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높이기 위해 음악과 스토리를 포함한 극적 장치를 활용한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다룬 작품을 접할 때는 냉정하게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리적 거리감’이라는 방어선을 두기 마련이다. 애써 지키던 그 방어선은 그 대사 한 방에 무너졌다. 그 선이 무너지자, 어느 순간 만섭이 됐다.

만섭은 그래도 정부가 하는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소시민의 전형이다. 게다가 빚을 갚으면서 딸을 홀로 키워야 하는 처지에 그 진실의 속사정까지 세세히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광주로 U턴한 것은 최소한 손님을 두고 와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관계자들과의 최근 모임에서도 이 작품은 단연 화제였다. 역사 속에서 만섭의 손님이 상징하는 것처럼 무한책임의 사례는 없을까. 한 참석자가 언급한 고려 문신이자 학자 이제현(1287∼1367)에 얽힌 스토리가 있다. 다양한 분야와 인물의 글을 수록한 ‘용재총화(용齋叢話)’에 전하는 내용이다.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문 충선왕은 귀국하면서 정인(情人)에게 이별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남겼다.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왕은 이제현에게 그녀를 살피도록 했다. 그가 가보니, 제대로 먹지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여인은 억지로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써 줬다.

그러나 이제현은 그 여인이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을 수 없다고 거짓을 고했고, 왕은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 해 왕의 생일에 이제현은 술잔과 함께 죽을죄를 지었다며 시를 올린다. 이에 왕은 “그날 이 시를 봤다면 죽을힘을 다해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해 다른 말을 했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봉건시대 관료에게 그 거짓말은 목숨을 건, 무한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손님들을 두고 온 무책임의 사례가 적지 않다.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든 살충제 계란 파동은 당국의 전형적인 무능과 무책임을 보여준다. 국회와 정부, 지자체 차원에서 진행된 다양한 명목의 해외 시찰은 매년 외유성이라는 도마에 오른다. 뜬금없는 인증샷 대신에 촘촘하게 사육 환경이 표시된 프랑스 계란을 꼼꼼히 봤더라면 어땠을까.

탈원전 정책을 추진 중인 대만에서의 최근 대정전(블랙아웃)도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는 없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역할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는 것도 불안하다.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있어도 해결이 쉽지 않은 현안들이기 때문이다. 자리보전이 아니라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는 소신이 필요하다.

영화의 잔상이 생생하다. 만섭의 택시번호판은 ‘서울3 구3151’. 실제 이런 번호판도 있을까, 그는 왜 나중에 연락하지 않았을까?

오늘도 사람들은 집과 직장, 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운전하는 삶의 택시에 손님을 태운다. 혹 두고 온 손님 없는지, 다시 볼 일이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택시운전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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