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8>만년의 쓸쓸함은 숙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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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만년(晩年)이란 것은 쓸쓸한 게 당연한 일이다.’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 ‘바람에 날리며’》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
20여 년 전 읽은 일본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의 ‘바람에 날리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때는 젊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 구절을 가벼이 넘겼다. 한데 최근 잦은 노인 고독사 소식을 접하면서 그 말은 불쑥불쑥 내 머리 언저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 나이가 들면 옛날 같을 순 없지. 나를 찾는 발길이 뜸해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돌연 서럽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고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전쟁과 가난, 우리 세대는 참으로 기구한 시절을 살아냈다. 그래서일까. 길에서 비슷한 연배를 만나면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다. “노형, 우리 용케도 살아남았구려.”

얼마 전 한중일 문화정신의학회에서 노인의 자살이 화제에 올랐다. 거기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일본 노인은 누추한 몸을 가족, 친구에게 보이기 싫어하다 깨끗하게 죽는다. 반면 한국 노인은 ‘내가 저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저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서러워하다 죽는다는 얘기다. 노인들이 이쓰키의 경구를 접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효(孝) 이야기가 나왔으니 따져보자. 우리 아이들은 어릴 적 이미 효도를 다 했다. 걸음마를 떼고, 바닥을 구르며 웃고, 막 옹알이를 할 때 온 가족이 모여앉아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게 바로 효인데, 무엇을 더 바라랴. 어쩌다 자식이 나이가 들어서도 잘하면 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드는 쓸쓸함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다. 그걸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면 평소에 많이 베풀어야 한다. 더러 후배를 불러 술도 사고 친구에게 커피도 사야 한다.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마라. 거지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으랴.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여든셋이 되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낯선 지방으로 강연을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곤 낯선 여관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불러주기만 한다면.’

나도 딱 같은 생각이다. 내 유언장에는 ‘장기기증 후 (시신을) 가까운 의대에 시급히 실습용으로 기증하라’고 되어 있다. 홀로 왔으니 가는 길도 홀로 가는 게 마땅하다.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저자는 나보다 한 살 위다. 광복 전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온 후 지방으로 전전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책에는 한국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하는데 짙은 향수에 젖어 있는 게 느껴진다. 한국 정서에도 밝다. 한(恨)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작가는 일본 최고의 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인생을 대하는 솔직한 태도가 좋다. 그의 책을 읽노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국경을 넘는 동시대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노년의 쓸쓸함을 위로받는 것 같다.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
#이쓰키 히로유키#바람에 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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