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해]‘문재인 케어’와 황금알 거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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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 논설위원
최영해 논설위원
미국에서 한 번이라도 아파 본 사람은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이 얼마나 좋은지 절감한다. 병원에서 날아오는 청구서는 상상을 초월한다. 응급실에 가면 2000달러(약 230만 원) 계산서를 들이민다. 안경 맞추려고 시력검사 하는 데 200달러, 감기 걸려 내과의사 얼굴만 봐도 기본이 150달러다. 급성맹장염에 걸려 3일 입원해 수술하고 날아온 병원 청구서가 3만 달러였다는 동료 기자의 비명도 생생하게 들어봤다. 집안에 암 환자라도 있으면 온 가족이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암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이 20만 달러(약 2억3000만 원)는 족히 된다. 보험이 없으면 아파 죽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건강에 대한 책임을 사회공동체가 지지 않고 개인에게 맡기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美, 맹장염 수술에 3만 달러

한번은 속이 더부룩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으려 했지만 의사가 과잉진료라며 난색을 표시해 검사를 못 했다. 한국에선 건강검진 때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위내시경도 미국에선 보험 없으면 2000달러다. 10년 전쯤 워싱턴의 한 흑인 아이가 이가 아팠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다가 치통이 결국 뇌로 전이돼 급기야 사망하는 반(反)인륜적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미국은 한국처럼 정부가 운영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없다. 회사나 개인이 민간 보험사에서 의료보험을 사야 한다. 수년 전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할 때 4인 가족의 의료보험료로 매달 1000달러를 냈지만 안과와 치과는 쏙 빠진 반쪽 보험이었다.

암에 걸리면 총 진료비의 5%만 내면 되는 한국은 미국인들 눈엔 의료천국이다. 엄청난 의료비 때문에 재미교포들은 한국 오면 치과부터 들르고 ‘의료쇼핑’에 나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정책 실패는 민간과 시장에 맡겨 놓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부르는 게 값이고, 보험사들은 비싼 보험료로 배를 불려 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전 국민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오바마 케어’에 서명하면서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중산층도 비싼 의료보험 가입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소득에 따른 차등 보험료와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우리 국민건강보험 제도엔 사회민주주의 요소가 농후하다. 정부의 개입으로 의원부터 상급병원에 이르기까지 평균 의료수가(酬價)는 원가의 70%에도 못 미친다. 의료기관들은 그동안 이 부족분을 각종 검사 등 비급여 항목으로 메워 왔다. 연간 의료비 지출을 100만 원으로 묶어두겠다는 ‘문재인 케어’의 핵심이 비급여 항목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희귀질환 치료를 보장하고 컴퓨터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MRI)도 보험으로 커버해 주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분명치 않다.

선한 정책도 설계 정교해야

지금 건강보험 재정이 20조 원 흑자라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불과 3년 뒤인 2020년에 적자가 19조 원으로 예측했다. 정부가 예상한 적자 전환 시기보다 5년이나 당겨진다는 계산이다. 적자 규모가 2025년 55조 원, 2030년엔 108조 원으로 불어나는데 이것도 문재인 케어를 반영하지 않고 계산한 것이다. 5년간 투입될 30조6000억 원이 대통령이나 경제부총리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가 떠안아야 하는 무거운 짐이다. 부유층이 저소득층을 지원하고, 젊은 세대가 노인 의료비를 대고,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의 치료비를 부담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부터 선행돼야 한다. 아무리 선한 정책이라도 설계가 정교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당장 급하다고 황금알을 낳던 거위의 배를 갈라 알을 꺼내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문재인#국민건강보험#건강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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